박근혜 대통령이 24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최순실게이트’로 극도의 궁지에 몰리고 있던 대통령이 여지껏의 개헌반대입장을 180도 바꿔서 개헌을 제안했다. 청와대는 “필요하다면 청와대가 개헌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까지 밝혔다. 임기 말 레임덕방지 또는 레임덕탈출용 카드를 준비해왔을 터인데, 그 중 하나가 최순실게이트로 앞당겨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개헌 자체는 다수의 지지와 명분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권은 대통령의 개헌제안이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개헌국면으로 바뀌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통령의 개헌제안이 순수하지 못하므로 논의 자체를 반대한다”며 개헌반대전선을 형성하고 이끌어갈 지도력을 갖춘 적임자가 없기 때문이다. 개헌제안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비판하면서도, 개헌논의 자체에 참여하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정치권, 좀 더 분명히는 야권이 대통령의 개헌제안으로 상당기간 교란상태에 빠질 것이다. 청와대는 물론 이 점까지 계산했을 것이다. 최순실-우병우 등 청와대를 곤혹스럽게 했던 사안들은 뉴스 전면에서 조금씩 밀려나면서, 개헌을 둘러싼 분열과 백가쟁명식 토론을 매개로 한 대선 주자 군과 주요 정치세력들 간의 이합집산-합종연횡이 뉴스 전면에 떠오를 것이다. 대선 주자들 중 안철수 손학규 등은 개헌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제3지대론을 주장해온 김종인 안철수 등이 개헌을 매개로 어떻게 연결될지도 관심사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24일 “개헌이 아니라 부패척결의 적기”라며 대통령의 개헌제안에 반대를 분명히 했다. 김부겸 의원은 “대통령 주도 개헌이 아니라 국회 주도의 개헌”을 주장하고 나왔다. 그러나 국회가 개헌에 대해 단일 대오를 이룰 가능성은 무망하다. 대통령 주도의 개헌은 반대한다는 ‘잠정적 개헌반대론’부터, 국회 주도 개헌론, 권력구조를 둘러싼 이견 등 적어도 네댓 가지의 스펙트럼을 보일 것이다. 

개헌을 누가 주도하느냐, 언제 개헌할 것인가, 최종적으로 개헌 국민투표를 언제 실시하느냐, 새로운 헌법을 언제부터 적용시키느냐, 권력구조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새로운 국가원수의 임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등등 예상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 그래서 개헌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질 가능성도 상당하다. 

개헌하려면 재적 국회의원 1/2(151명)의 발의와, 2/3(200명) 찬성 후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새누리당은 청와대 뜻을 받들어 개헌찬성에 나설 것이고,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의견이 갈릴 것이다. 현 의석분포 상 새누리당이 독자적으로 개헌안을 발의할 수는 없다. 발의를 위해서는 최소 22명, 국회통과를 위해서는 최소 71명의 타 정당 의원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청와대가 독자적으로 개헌안을 낼 수는 있지만, 국회를 그대로 통과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24일 대통령의 기습적 개헌제안의 핵심 파장 중 하나는, 야권이 얼마나 교란되고 어디까지 분열하느냐일 것이다. 대선 주자들은 결국 개헌에 대한 입장을 내놔야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내년 대선구도의 변동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 여기에 백남기농민사건과 최순실게이트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바탕으로 한 재야 시민세력이 “대통령 주도의 개헌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견지한다면 ‘개헌 난분분’ 현상이 장기화되다가 개헌론 자체가 표류할 가능성도 상당하다. 

왜냐하면 현 야권 구조상 대통령의 기습적 개헌론에 맞서 국회 주도의 질서정연하고 대오를 갖춘 개헌논의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뚜렷이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강력한 개헌론자이긴 하지만, 국회의장 신분상 개헌을 직접 이끌고 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청와대는 개헌제안을 통해 ‘최순실 난국’을 분산시키는 국면전환은 물론, 정치권의 교란과 분열을 통해 “그간의 국정운영 총체적 실패”라는 화살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효과도 일정 부분 거둘 것이다. 

정략적 개헌이 아니라, 30년 전인 87년 체제의 낡은 옷을 벗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이다. 개헌논의와 내년 대선은 어떻게 맞물려서 펼쳐질 것인가. 오늘부로 정치권은 새로운 궤도에 접어들었다. ‘개헌은 개헌이고, 최순실은 최순실’이라는 정서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 둘을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분리해서 끌고 나갈 수 있을지, 그런 역량이 야권에 있는지가 숙제로 던져졌다. 야권은 또 한 번 시험대에  들었고, 수세에 몰리던 대통령은 일단 국면전환과 개헌 제안이라는 선제 효과는 거두고 들어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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