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 칼럼] 최소한의 안전판마저 사라진 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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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영호 공사 망명과 대통령의 발언

     김근식(경남대 교수, 정치학)

      태영호 공사 망명으로 떠들썩하다. 한국으로 온 최고위급 외교관이라는 설명과 함께 자식교육을 위해 남쪽을 택했다는 이민형 탈북이라는 개념도 등장한다. 거액의 김정은 비자금을 갖고 나왔다는 미확인 보도와 영국 정보기관의 주도로 미국 독일의 협조하에 성사된 밍명작전 설명에 이르면 가히 한편의 첩보영화 수준이다. 북한의 금수저인 빨치산 일가가 그것도 체제선전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인물이 스스로 체제를 버렸다면서 김정은 체제의 붕괴는 시간문제라는 호들갑도 등장한다.

      그러나 태영호 공사 망명은 극적이긴 하지만 그리 호들갑을 떨 만큼 놀랄만한 사건은 아니다. 독재국가에서 권력교체기는 정치엘리트들의 이탈을 가져온다. 절대권력이 지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면서 뜨는 별과 지는 별이 생기는 건 당연하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정하게 될 때, 해외에 나와 있는 외교관들의 이탈 결심은 그리 새로운 게 아니다. 1990년대 사회주의 붕괴와 김일성 사망 이후 유독 많은 외교관과 해외일꾼들이 탈북한 것도 그 맥락이었다. 김정일 체제에 적응 못하고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황장엽 비서의 서울행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공포정치와 잔혹한 숙청이 자행되는 김정은 정권에서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걱정하게 되고 다 자란 자식의 질높은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태공사의 망명결심은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다.

      때문에 태공사 망명을 확대해석하고 과도한 기대를 섞어 북한정세를 예단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독재국가의 외교관이 겪는 자괴감과 귀국후 정치적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인간적인 고민에서 비롯된 정치적 결단을 마치 지금 당장 북한체제의 붕괴로 연결하는 것은 그래서 너무 앞서가는 것이다. 일반 주민이든 고위급 엘리트든 개별적 탈북은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저항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탈출이자 도피이기 때문에 정권에 대한 집단적 차원의 저항과 구별된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을 탈출한 이들이 부쩍 늘었음에도 김정일 정권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97년 주체사상의 창시자 황장엽 비서의 망명은 이제 당장 김정일 정권이 망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김정일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태공사의 망명을 행여나 박근혜 정부가 북한붕괴의 신호탄으로 간주하고 섣부른 대북정책을 생각한다면 비현실적인 주관적 기대(wishful thinking)에 불과하다. 객관적인 현실을 도외시한 잘못된 정책일 수밖에 없다. 북한이 붕괴되어야 한다는 자의적 기대와 북한이 당장 붕괴한다는 객관적 현실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공사 망명 이후 정부의 대응은 마치도 정권붕괴의 전주곡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다. 태공사 말고도 북한 외교관들이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탈북하고 있다고 뒤늦게 확인해주고 있다. 북한식당 종업원의 집단탈북도 잇따르고 있다고 다시 상기시켜주고 있다. 김정은의 비자금을 담당하는 고위군관도, 수학 영재도, 김정은 서기실 금고지기도 북을 떠나고 있다는 경쟁적 보도까지 사실 확인도 없이 쏟아진다. 급기야 서해상으로 목선을 타고 북한 주민이 탈북했다는 보도로 이제 북한판 엑소더스가 시작된 듯한 분위기마저 만들고 있다.

      탈북은 어제오늘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보다 증가했다는 탈북자 숫자도 김정은 시대 급감하면서 최저점을 찍은 작년에 비해 소폭증가한 것이지 봇물터지듯 탈북이 급증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태공사 망명을 계기로 북한의 체제이탈이 가속화되고 곧 정권이 붕괴될 것으로 전제한다면 이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특히 대통령이 이같은 주관적 기대에 매몰되어 있다면 이는 더욱 심각하다. 그러나 상황은 대통령이 자의적 정세인식에 빠져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냉전시기에도 듣기 어려운 대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 ‘간부 여러분’과 ‘일반 주민 여러분’을 호칭하고 통일이 되어도 전혀 불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대통령이 국정기조와 방향을 국내외에 천명하는 몇 안되는 계기인 8.15 경축사에서 북한에 대고 탈북을 종용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뒤에 정황으로 짐작컨대 태공사의 망명을 사전보고 받고 드뎌 북한붕괴의 서곡이 시작되었다는 인식하에서 그 내용이 삽입된 것이라면 이는 더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붕괴상황을 대비하고 내부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들여다보는 것과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상대방의 붕괴를 기정사실화하고 체제이탈을 유도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북이 곧 망할 것이라는 정세인식이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곧이어 대통령은 을지훈련 기간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도 북한의 체제동요 가능성을 공식 언급했다. 태공사 망명 이후 김정은 체제의 균열조짐과 정권붕괴를 이제 현실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그렇잖아도 최악의 파탄지경인 남북관계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탈북유도와 체제동요 발언은 이제 정상적인 남북관계 복원은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한발 더나아가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제는 김정은을 호칭 없이 거명하고 응징과 자멸이라는 최고수준의 단어들을 쏟아냈다. 아예 임기동안 북한과는 대화를 할 생각조차 포기한 듯하다. 아마 임기 이전에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확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남북사이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모두 사라지고 제거된 상태다. 다투고 갈등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안전판은 갖고 있어야 한다. 3차 핵실험에서도 지켜냈던 개성공단마저 스스로 폐쇄했다. 금강산 관광 중단과 5.24 대북교역 중단에 이어 남북의 마지막 끈을 제거한 것이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절 통일부 홈페이지 초기화면에는 실시간으로 북한체류 인원과 차량이 숫자로 표시되었다. 남북이 서로 사람과 물자고 오가는 상황은 적어도 전쟁방지의 안전판이 작동하는 것이었다. 이젠 남북 사이에 함께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는 끈은 단 하나도 없게 되었다. 남북 사이에 단 한 개의 대화채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소통하고 만나고 함께 하는 단 하나의 안전장치도 없는 상태에서 이젠 상대를 향해 도저히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들이 쏟아진다. 간부와 주민 여러분을 상대로 겁먹지 말라는 선무용 발언에서부터 북한의 내부균열과 체제동요를 거론하며 만약에 있을 북의 테러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부단속용 발언까지 서슴치 않고 이어진다. 이제 남북은 갈데까지 가버렸다. 최소한의 안전판마저 사라진 상태에서 지구상 가장 치열한 군비경쟁의 한복판으로 들어와버렸다. 이보다 나쁠 수 없다는 최악의 상황을 갱신하고 있는 남북관계, 그 끝이 두렵고 위험하다.

    김근식 기자 kimos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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