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지난 2012년 대선 국면에서 이 캐치프레이즈를 들었을 때, 필자는 시대정신과 민심 소재를 압축적으로 반영한 미래지향적 구호라고 생각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후로 가장 딱부러진 슬로건이 아니었나 싶다. 사뭇 문학적이기까지 했던 ‘저녁…’을 내건 후보는 그러나 당내 예비고사에서 실패했다. 손학규. 현역 정치인 중 그만큼 자질을 인정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가 두 번째 칩거를 마치고 필드에 복귀하는 모양이다.

손학규는 ‘대통령직을 잘 수행할 것 같은 후보’ 조사에서 여러 번 1위에 오르곤 했다. 그러나 그는 본선에 출전조차 못했다. 대선 후보를 정하는 당내 예비고사에서 번번이 막혔다. 왜 그럴까. 그가 보수진영에서 야권으로 넘어온, ‘출신 성분’이라는 원죄 때문에? 그럼 그의 정치적 출발지인 한나라당에서 그는 왜 뜻을 이루지 못했을까? 토양이 척박해서? 손학규라는 씨앗이 떡잎을 지나 나무로 자라나기에는 수구보수라는 밭은 너무 척박했거나 이질적이긴 했을 것이다.

장려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진영을 바꿨다는 게 이마에 새기고 다녀야 할 천형(天刑)이나 주홍글씨 같은 낙인은 아니다. 민주적 전통이 깊고 양당제가 뿌리내린 국가에서야 당을 바꾸는 일은 호적을 바꾸는 것처럼, 정체성에 직결되는 중대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사에서 그런 훼절이나 전향의 사례는 적지 않다. 이적 이후가 중요하다. 출신 성분을 들어 손학규를 흠집내거나 비토하는 것은, 지난 정치사를 감안컨대, 유독 그에게만 가혹한 게 아닐까? 김영삼이건 김부겸이건 손학규건 간에, 최종 평가는 그들이 했던, 또는 하고 있는 정치행위를 통해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복귀 임박 소식이 전해지자, 기다렸다는 듯 이런 기사나 글들이 올라온다. “킹이냐 킹메이커냐” “더민주-국민의당 중 어디로?” “새누리서도 손학규에 관심” “손학규, 누구 손 들어줄까”…. 다 일리있는 얘기이자, 누구나 함직한 얘기들이기도 하다.

필자는 대선을 후보 개인에만 집중해서 보는 시각과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5년이라는 시간의 마디가 너무 짧지만, 대선은 시대정신이나 우리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을 담고 있어야 한다. 5년마다 치러져온 대선이지만, 적어도 20년 후 쯤은 내다보고, 다가올 그 파도를 위해 당장의 5년 동안 준비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겨루는 선거여야 한다. 그러나 대선전이 막판으로 갈수록 시대정신 논쟁은 희박해지고, 오로지 후보의 각종 ‘제원’과 진영 간 사생 결단에 매몰된다. 필자 개인적 지지 여부나 선호도를 떠나 돌아보건대, “반칙없는 사회, 사람 사는 세상”을 내건 노무현 후보 정도가 시대정신을 분명히 제시했다고 평가한다. 대통령이 되었건 실패했건 간에 여타 후보들은 딱 한가지로 선명히 떠오르는 비전이나 시대정신이 없다.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백화점식으로 나열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치 재개가 임박한 그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졸견이 있다.
세 번 째 복귀인 손학규는, 분명하고도 묵직한 시대정신과 함께 돌아와야 한다. 대선이 1년 여 정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막연히 ‘뭔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나 개인적 정치욕망에서가 아니라, 달라진 시대정신을 갖고 돌아와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복귀의 명분이 선다. 선거에 실패해 잠시 떠났다가 때가 되면 돌아오는 것은 철새나, 회귀본능으로 모천을 찾는 연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아울러 그의 복귀가 여지껏의 후진적 대선 풍토, ‘전부 아니면 전무’인 망국적 전통을 바꾸는 데 기여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한다. 본인이나 지지자들은 마뜩찮아 하겠지만, 그는 정계에서 원로 반열에 올라있다. ‘뒷방 늙은이’라는 의미의 원로가 아니다. 그의 경력과 경륜이 그렇다는 얘기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권위를 인정할 만한 어른이나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할 시대정신이나 미래 가치관이 그래서 궁금하다. 어느 정파에서 누구와 정치를 하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지난 9년을 담당했던 정부에서 저질러진 과오를 어떻게 바로잡고, 정치권력을 통해 국민들 삶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비전이, 킹이냐 킹메이커냐 보다 더 중요하다. 그가 내미는 비전에 따라 국민들은 그에게 킹을 맡길 수도, 킹메이커에 마저 인색할 수도 있다.

야권의 통합-연대에 관한 그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많다. 잠시 돌아앉아있었던 손학규가 심판이나 조정자가 되어 연대-통합을 실현시켜달라는 염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막연한 기대치를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유력 정치인 몇몇이 선언하는 연대-통합의 실패 이유는, 시대정신을 매개로 한 연대-통합이 아니라, 당선가능성과 사후 권력공유를 고리로 했기때문이었다. 잠시 돌아앉아있었던 손학규가 아니라, 손학규가 들고나오는 시대정신을 고리로 통합-연대가 논의되고 추진되길 희망한다.

아울러, 그의 두 번에 걸친 칩거가 항간에서 말하는 ‘형세 관망’이나 ‘몸값올리기’라는, 다분히 인신공격적 언사들로 오염되지 않기를 바란다. 굳이 이 글에서까지 언급해야 하는지가 고민스럽지만, 항간에 그런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니 적는다. “지난 4.13총선 때는 어정쩡하게 있다가 민심의 폭발을 보고 나니 숟가락 하나 들고 판을 갈자며 달려든다”고 일각에서 비아냥댄다. “순진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 들려오는 듯 하지만, 필자는 그런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제1야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마다 그가 보여준 헌신성(2011년 분당 재보선 출마나 선거참패 후 비대위원장 수락 등)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런 일부의 비아냥은 저질 인신공격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난 1일 해남에서 “사방이 꽉 막혀 우물에 빠진 돼지 형국이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 여러분께서 준 용기를 국민에게 꿈과 희망으로 되돌려 드리겠다”고 밝혔다. 그가 돌아와서 ‘우리의 저녁’을 만드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기 바란다. 그 역할의 끝에 킹이든, 킹메이커든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강윤. lkypra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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