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복면은 언제 벗을 것인가

<사진=연합뉴스></div>
▲ <사진=연합뉴스>

베네치아 카니발은 해마다 사순절 전날까지 10여일 동안 벌어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이다. 화려한 가면과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누비며 축제의 한마당을 펼친다. 그 유래는 중세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네치아는 해상무역으로 부를 쌓았지만 평민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그들은 찌든 삶을 잊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씀으로써 축제일만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채 귀족 행세를 했다. 그렇다고 가면을 원했던 것이 약한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중세 이후에는 귀족들도 가면을 쓰고 축제의 거리로 나섰다. 그들도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일탈을 꿈꾸었을 것이다. 약자도 강자도 모두가 가면을 원했다. 이청준의 『가면의 꿈』에서도 잘나가는 젊은 판사가 가면을 쓴다. 그는 천재놀음만 해온 자신의 얼굴이 가면을 쓴 얼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는, 그 가면 쓴 얼굴을 덮기 위해 밤마다 가면을 쓰고 외출을 한다.

이렇듯 누구나 가면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용어를 쓴다. 원래 그리스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이 페르소나였는데,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에 의해 심리학 용어가 되었다.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고 했다. 가면을 아예 쓰지 않으면 현실에서 살아가기 어렵다. 하지만 가면에만 익숙해지면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적절한 정도의 가면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면을 벗으라 한다. 굳이 ‘복면’이라 하지 않아도 그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베네치아 카니발에서의 가면은 평민과 귀족이 어우러지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소통의 도구였다. 그 곳에서 가면은 신분과 계급, 지위를 따지지 않고 함께 하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오늘 한국 사회에서 복면은 대결과 충돌의 산물이다. 시위자는 복면을 씀으로써 경찰의 채증 사진으로부터 얼굴을 숨기고 캡싸이신의 고통을 피하려 한다. 그들이 복면을 썼다고는 하지만 막상 IS처럼 사람을 살상하려 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다. 그저 차벽 앞에서 분을 참지 못해 복면을 쓴 사람들이다. 차벽에 맞서 복면을 쓰는데 대한 의견은 엇갈리겠지만, 그들도 국민이다. IS가 아니다. 

복면을 쓰지 말라 하면, 그렇게하는 것이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국민들도 구태여 쓰지 말라고 한다면 굳이 쓸 필요가 없다. 복면은 벗어던지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약자는 복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는데 강자는 복면을 쓴 채로 있다면, 그것은 비대칭의 관계가 되고 만다. 그것이야말로 자꾸 복면에 손이 가도록 유혹하는 이유이다. 국정교과서 집필진의 얼굴을 숨기는 일, 1970년대식 거짓의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는 이중적인 권력의 모습, 일사불란하게 기획된 듯이 보이는 공안몰이식 정국대응, 이 모든 것들은 오늘 권력이 쓰고 있는 복면이다. 자기의 실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 복면은 언제 벗을 것인가.

그 대답만 나온다면 차벽 앞에 있던 복면들은 한데 모아 시위대 스스로에 의해 불태워질 것이다. 권력이 진정 복면을 벗기고자 한다면 힘으로 그리할 것이 아니라, 구태여 복면을 쓸 이유가 없게 만들면 되는 일이다. 자기 얼굴의 복면부터 벗으면 함께 벗게 되어 있다. 복면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햇볕을 내리쬐주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날 모였던 10만명 가운데 복면을 썼던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는지이다. 복면이 그렇게 문제라면, 복면도 쓰지 않고 차벽에 손도 대지 않은 9만 9천 수백명의 절박한 요구에는 어째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인지 묻고 싶다. 느닷없는 ‘복면’ 얘기를 앞세워 그 목소리들을 덮고 가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복면이다. 아주 두꺼운.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