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면 상식을 이겨도 되나

"대통령을 이길 수는 없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말이다. 얼핏 들으면 대단히 현실적인 판단인 것처럼 들린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원대대표를 불신임하여 물러나라 하고 있는데, 유 원내대표는 물러날 이유가 없다며 사퇴를 거부하고 있다. 급기야는 여당 내의 친박-비박 세력 간의 권력투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 대표의 말은 누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한 사람은 대통령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보다 아래에 있는 여당 원대대표라는 차이를 분명히 한 얘기이다.

대통령이야 나라의 최고 권력인데 설혹 부당한 요구를 한다 치더라도, 그에 끝까지 맞서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러려 해서도 안된다는 뜻이 담겨있을 것이다. 권력의 세계에서는 힘이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굽혀야 한다는 생존의 철학인 셈이다. 오랜 세월 정치를 하면서 산전수전 다겪은 정치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얘기이다. 최고 권력 앞에서 머리 숙이지 않은 죄로 고초를 겪거나 찬 이슬을 맞아야 했던 정치인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겠는가.

하지만 그 얘기는 김 대표가 정치를 해왔던 과거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율법이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제왕이나 절대군주로 받아들이기를 국민이 거부하는 오늘의 시대에서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는 아니다.

이번에 박 대통령이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보인 태도는 한 두가지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메르스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확산된 상황에서 자숙하기는 커녕 권력투쟁과 정쟁을 야기하는 행동을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여당 원내대표에게 할 얘기가 있으면 따로 전화를 걸어서 하든가 하지, 국정을 논하는 국무회의 석상에서 집안싸움 거리를 꺼낸 것부터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박 대통령이 유 원내대표를 비토한 내용도 모순투성이였다. 무엇이 ‘배신’이고 ‘자기정치’인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채 일방적으로 배신자로 낙인찍고 선거에서 심판해달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아연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권력의 최고 자리에 있는 대통령이라 해도, 자기 말을 고분고분히 듣지 않았다고 이런 식으로 매도하고 선거에서 떨어뜨려 달라는 식의 속좁은 모습을 보인 것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의 권력은 그럴 때 마구 휘두르라고 위임한 것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불신임 신호를 보냈는데도 여당에서 재신임 결론을 내자 청와대가 친박을 앞세워서 유 원내대표 사퇴를 압박하고 있는 광경은 정당민주주의를 기초부터 뒤흔드는 행위이다. 여당 내부에서 의원들이 선출한 원내대표를 단지 대통령이 싫어하니까 물러나라는 식의 대응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나 가능했을 일이다. 만약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여당 원내대표가 사퇴하는 장면이 생겨난다면 이는 우리 정당민주주의를 1970년대 수준으로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를 찍어내기 위해 박 대통령이 보인 태도와 입장은 이처럼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자기 말을 순순히 듣지 않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다는 독한 오기 앞에서 보편적인 상식이 파괴되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이겨야 하는 것인가. 단지 그가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고 잘못된 처신들이 이겨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정치란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정의롭지 못한 일들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박 대통령이 이겨서는 안된다. 만약 그가 이긴다면 유승민이 아닌, 상식을 이기는 광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는다. 과연 유승민이 대통령을 이기면 안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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