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걸린 무죄 판결,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가 


지난 1991년 5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자살했는데 당시 검찰은 같은 전민련 소속의 동료였던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기소를 했다. 1991년은 당시 노태우 정권을 반대하는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던 시기로 그해 4월에는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경찰의 시위진압과정에서 숨지는 사고까지 겹치면서 정권이 위기에 봉착했던 시점이었다. 강기훈씨에 대한 유서대필을 통한 자살방조 혐의는 공안당국이 수세에 처한 정국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이 당시에도 제기된 바 있었다. 


이런 의혹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동원하여 강기훈씨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고 구속 기소했고 이듬해 법원은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그 과정에서 보수언론은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호재로 삼아 마녀사냥식의 여론몰이에 나섰으며 박홍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민주화운동 세력을 배후로 지목하며 공격했고 김지하 시인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글을 개제하며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강기훈씨는 만기복역 후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2008년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재판부는 7년이 걸려 사건 발생 24년 만에 자살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를 판결하기에 이르렀다. 20대 청년이었던 강기훈씨는 이미 50대를 넘겨고 간암을 선고받고 치료 중인 상태로 심신이 망가져서 사회활동이 어려운 처지이다. 아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했던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 친지들도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몸을 던졌던 김기설씨는 남의 조종을 받고 움직이면서 자신의 유서조차 쓰지 못하는 사람으로 폄훼되었고 아들을 잃고 명예마저 짓밟혀야 했던 김기설씨의 가족, 친지 모두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너무도 늦게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앗아 가버린 세월이었다.


사건조작의 책임자는 김기춘 당시 법무장관, 검찰 사람을 도구로 보는 시각 여전해


1991년 당시 검찰을 총괄 지휘하며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했던 최고 책임자는 김기춘 당시 법무장관이었다. 김기춘 장관은 스스로 검찰총장을 지낸 공안통으로서 위기에 처한 정국을 일시에 만회하기 위해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기획하여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2년 대선 때는 초원복국 사건의 장본인이기도 했던 김기춘씨가 고령임에도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할 만큼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이 같은 업적(?)들을 꾸준히 쌓아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유감을 표명한 바가 없었고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 판결했지만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검찰이 강기훈씨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동원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은 이후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을 해준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검찰이 사건 조작에 확신을 가지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이나 무죄로 판명난 지금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사람을 도구로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불법적 행위에 가담한 사람이 처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성장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무죄로 판명되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위해 이 같은 만인이 공노할 사건을 기획하고 조작한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설사 법이 정한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은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국판 드레피스 사건이라 불렸던 이 전대미문의 조작사건의 전말이 밝혀져야 검찰 등이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고 나서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공권력 지상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불법을 자행하고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사하고도 사과조차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그들 스스로가 국민 위에 군림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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