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 이신범 의원은 서울대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특히 1980년 신군부 시절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당시 비화를 말해달라.


(이때 정계에 들어왔을땐가)

아니죠. 복학생일때죠. 서울대학교 제적당했다가 71년도에 서울법대 제명당했다가 80년 3월에 형식상 복학이 됐는데 물론 지명수배 상태기 때문에 등교는 못했지만 복학생신분이었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줄거리라는게 뭐냐면은 김대중 당시에 영향력 있던 김대중씨가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한 그룹이 있고 그리고 재야에 문익환 목사가 대표로 있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약칭 국민연합이라는 재야단체가 있고 그 아래 민주청년협의회라는 복학생단체가 있는데 그 복학생단체는 70년대 말에 감옥에 갔다온 청년학생 한 200여명이 결성했던 인권민주화운동단체입니다.

그 복학생단체에 제가 상임위원회 의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학생으로 이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있고 무슨 각대학에 학생회가 있어서 그렇게 활동들을 했는데 80년 봄에 시위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됐냐면은 재학생들이 중심이 돼서 물론 시위를 이끌었습니다만은 복학생들이 당시에 교정으로 돌아가서 서울대학교에도 복학생수가 상당수 됐기 때문에 복학생들이 재학생들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형태로 전개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계엄사령부에서 5.17계엄확대조치를 해가지고 소위 그 1차 쿠데타는 12.12사태때 일어난거고 2차 쿠데타 소위 영어로 컨설리데이팅 쿠데타라는걸 일으켜서 권력을 공고화하는 그 단계 들어갔을때 그걸 정당화하기엔 각본이 필요하니까 어떤 세력이 폭동을 일으킬려고 했다,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킬려고 했다는 줄거리를 조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작을 하다보니까 재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시위를 했다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그것을 복학생들이 조종했다, 그 복학생은 국민연합이 조종했다, 그 국민연합은 김대중씨가 조종했다, 이렇게 네 개의 단계로 줄거리를 조작한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죠. 재학생은 재학생들대로 독자적으로 활동을 했고 또 당시에 총학생회는 학생회비가 많이 걷혀가지고 뭐 복학생들이 재정지원을 전혀 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복학생들이 지원받아야될 정도로 재정상태도 아주 넉넉했습니다.

또 복학생들이 서울대학교 복학한게 당시에 이해찬 뒤에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나 또 김부겸 지금 의원이 된 김부겸씨나 이런 분들이 이제 복학을 해서 자유롭게 학내에서 활동을 한건 사실입니다만 그분들이 무슨 시위를 해라, 말라 뭐 이런 지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죠.

또 국민연합하고 그런 사이에 있었다는 저나 조성호씨나 이런사람들만 해도 저나 조성호씨는 그전해에 YWCA사건 소위 위장결혼사건이라고 그러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보궐선거반대집회 때문에 지명수배가 되가지고 은신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뭐 자유롭게 사람을 만날수도 없는 상탠데 그저 겨우 서울대학교 몇사람 만나고 또 가끔 지명수배중인 사람들끼리 회합을 한다든가 하는 정도였죠.

그리고 문익환 목사를 중심으로한 국민연합이라는 단체는 그야말로 아주 그 느슨한 재야각계인사들의 연합체였지 그게 무슨 시위를 주도할만한 음모결사가 될 수 있는 그런 기율이 있는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개신교에 문익환목사, 무슨 이해동목사 뭐 이런분, 천주교에 신부님들 몇분, 그다음에 윤보선 전대통령 그당시 재판받고 있었죠. 그리고 무슨 불교계 한두분, 재야에 고은선생이나 백기완씨나 이런분들해서 재야단체로서 이름은 있었습니다만은 무슨 성명서를 내고 상징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단체지 조직을 무슨 움직일 수 있는 역량있는 단체는 아니었습니다.

김대중 전대통령 후보만 해도 당시 무슨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여기저기 강연이나 다니고 또 저희들 학생들이 볼때는 김영삼씨하고 두분이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는데 마치 자유로운 선거가 올듯이 착각을 하고서 두분이 과잉경쟁을 해가지고 오히려 민주세력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비난을 저희들은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물론 저희들중에 복학생중에도 김대중씨와 가까운 분도 있었고 소수는 김영삼씨와 가까운 분도 있었는데 저만해도 김대중씨의 그런 그 과잉정치행동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고 또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이런 그 회합석상에서.

그래서 그당시에 김대중씨와 가까운 몇몇분들한테 제가 공격도 당하고 그런적이 있는데 오히려 독자적인 학생운동을 해야된다는 것이 저희들의 입장이었고 또 독자적인 투쟁을 통해서 계엄사태를 일으킨 신군부를 분쇄해야 되겠다, 이게 당시 우리 목표였는데 오히려 이제 체포된 다음에 이사람들이 이걸 전부 연결시켜가지고 이런식으로 줄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김대중씨가 문익환 목사에게 지시하고 문익환목사는 이신범에게 지시하고 이신범은 이해찬에게 지시하고 이해찬은 심재철에게 지시해서 폭동사태를 일으킬려고 했다, 요게 이제 그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보면은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줄거리입니다. 그리고 그거는 전혀 사실도 아닐뿐 아니라 아무런 증거도 없는 조작된 줄거리에 불과한거죠.

그렇게 해서 이제 자기들의 유혈사태를 일으킨 쿠데타를 정당화할려고 음모를 꾸며서 사건을 만들어서 군사재판에 회부를 했습니다. 재판을 진행을 할려다보니까 아무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사태가 벌어졌냐하면 재판이 8월 중순경에 열리기 시작했는데 그 며칠전에 새벽에 이제 보안사령부죠. 당시 전두환 소장이 이제 보안사령관이었고 그밑에 이학봉이란 사람이 대공차장인데 이사람들이 이제 사건을 조작한 사람들입니다.

육군교도소에 제가 있었는데 복학생중에 저만 혼자 육군교도소에 가있고 나머진 전부 서울구치소에 있습니다. 그리고 육군교도소에 이제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또 고은 뭐 이렇게 이제 김상현 뭐 이래가지고 저하고 7명인가, 6명 이제 당시에 7명이 처음에 가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상현의원이 서울구치소로가서 6명이 육군교도소에 남아있게 됐는데 새벽 한 2시경에 갑자기 장교들이 와서 문을 열더니 좀 따라오라는겁니다.

그래서 참 두렵기도 하고 걱정도 됐지만은 뭔가 그래서 갔더니 목욕탕 옆방으로 끌고가는거에요. 목욕탕을 통과해서 가니까 이제 보안사령부에서 그 두명이 나와있습니다. 교도소장이 옆에 앉았고.
뭐냐 그러니까 보안사령관 국가보위위원회인가 국보위라고 당시 만들지 않았습니까.

전두환 소장이. 국보위위원장이 지시를 해서 왔는데 이것이 역사를 참으로 좌우하는 중요한 모임이니까 좀 자기들이 얘기하는거 잘듣고 협조를 해달라, 그래서 해보라 그러니까 니가 김대중이하고 아무 관계없는걸 우리가 잘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거를 그대로 넘어갈 수 없으니 우리가 해달라는데로 협조를 해라, 김대중씨가 시위를 조종했고 시켰고 그대로 했다고 법정에 진술해주면 원하는대로 다해주겠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겠고, 미국을 보내달라면 미국을 보내주겠고, 국회의원 시켜달라면 국회의원도 시켜주겠다,

나중에 알고보니까 민한당 국회의원한 사람들이 대개 전두환씨가 사살상 시킨 사람들이에요. 국회의원 시켜주겠다는게 그안에서 제가 들을때 참 우스꽝스럽게 들렸지만 사실은 신군부는 야당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이제 내가 이렇게 얘길했어요. 당신들이 지금 김대중씨를 사형을 시킬려고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그사람하고 아무 관계가 없지만은 그런 영향력 있는 정치인을 사형시켜서 되겠느냐, 거기는 내가 협조할 수가 없다, 그랬더니 이제 협박도 하고 여러 가지 저한테 이제 많은 종용과 압력을 행사를 하고 그래서 이제 내일 아침에 그 아침이 아마 재판이었던걸로 기억을 해요.

아침에 공판장에 나가야 되니까 그전에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 그리고 한가지는 이 문제는 내가 결정을 못하겠다, 나 혼자 어떻게 이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겠냐, 서울구치소에 있는 학생신분의 구속자 전원하고 내가 의논을 할 수 있게 해주면 내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하겠다, 가타부타. 아, 그러면 아침에 서울구치소에 있는 학생들 전부 모을테니까 가겠냐 이거에요. 이 사람들이 그정도로 이제 사건을 조작할려고 아주 혈안이 되있었던거죠.

어쨌든 아침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으니까 겨우 눈을 부친둥 마는둥 아침에 공판준비를 할려고 법정에 나갈려고 나오니까 일어나니까 교도소장이 오더니 저사람들한테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할건지 태도를 분명히 해달라 그래서 내가 분명히 하겠다, 내 생각을 해봤는데 도저히 협조할 수가 없다, 내가 내인생을 여기서 그렇게 더럽게 살수가 없으니까 그냥 내 감옥산다고 그러시오, 감옥이 상당히 길거다, 길어도 좋으니까 나 아무상관없으니 나 여기서 그 얘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이러고 이제 끝을 냈어요.

그러고서 이제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 =계엄군법회의가= 거기 있었습니다. 지금 국방부뒤에. 거기를 이제 군용호송차를 한차에 세사람씩 탔는데 타고서 이제 와서 앞줄에 쭉 이제 앉았는데 뒤에서 부르는거에요. 뒤에 먼저 왔던 보안사령부 국보위 사람들이 다시 왔으니까 잠깐 뒤에가서 좀 볼 수 없겠냐, 아니, 재판중에 내가 왜 그사람들 만나냐, 자꾸 끌고가는거에요.

그래서 이제 뒷자리 가니까 담배를 턱 권하더니 하는 얘기가 협조를 좀 해달라, 국보위 위원장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인데 니가 죽고 사는게 너 지금 너도 상당히 심각하다 이거야 상황이. 물론 이제 내란음모로만 저는 돼있었습니다만은 그래서 이제 무슨 얘길할라고 그러냐 그랬더니 김대중씨가 시켜서 했다는 말이 정 하기가 어려우면 김대중씨가 시켰느냐는 말에 기억이 안난다고 좀 대답해줄순 없겠냐, 거기까지만 해도 자기네가 니가 원하는데로 좀 해줄수가 있다, 나 그거 못합니다, 그랬어요.

기억이 안나긴 왜 안나냐 그런 일이 없는데 그랬더니 뭐라 그러냐면 그러면 김대중씨가 시켜서 했느냐는 말에 대답을 안하면 어떻겠느냐 이거에요. 묵묵부답해라 이거죠. 조서용어로. 나 그렇게 못한다, 얘기 이제 끝난 얘기니까 나 그냥 징역살기로 했으니까 더 이상 이 얘기 꺼내지마시오 이렇게 된거에요.

그런데 저한테만 그런 종용을 한게 아니라 여러사람한테 이제 그런 그 종용을 하고 복학생중에 일부에도 했고 또 증인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했고 또 재학생중에도 했고 그중에 한두명이 상당히 그 그사람들이 시키는것같은 내용의 그런 그 진술을 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그게 뭐 신문에도 난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만은 어떻든 이사람들이 사건을 조작해놓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피고인들에게 압력을 넣어가지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근데 그 뒤에 법정에서 이제 제가 굉장히 강력하게 투쟁을 했습니다.

제가 물론 뭐 그까짓거 뭐 십몇년 징역받을텐데 제 개인문제만 두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투쟁할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도대체 학생운동을 독자적으로 일어난 민주화학생운동을 김대중이란 정치인이 조종하는 운동으로 몰아가는데 대해서 아주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그다음에 죄없는 한 정치인을 사형을 시킬라 그런다 거기다 뭐 광주사람들이 들고일어난 일을 사전에 알지도 못한 사람한테 뒤집어씌워가지고 사형시킬려고 그런다,

그런데 대해서 이건 도저히 있을수가 없다, 법정에서 대단히 강력하게 투쟁을 했는데 그덕분에 가장 멀다는 진주교도소로 이감을 가서 꼬박 2년7개월을 살았는데 김대중씨보다도 하루 더 살고 나왔기 때문에 주범이 먼저 나오고 종범이 나중에 나오는 이런 사건이 세상이 어딨냐하고 제가 웃은 일도 있습니다만은 어떻든 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이라는건 첫째는 철저하게 조작된거고 두 번째는 소위 이름이 그 당시 김대중일당내란음모사건입니다. 공식이름이. 김대중 일당이라는게 도대체 없었다.

그래서 김대중씨로부터 1원 한 장을 학생운동에 지원받은 일도 없고 또 가서 의논해본 일도 없고 그래서 제가 법정에서 김대중씨한테 커피라도 한잔 얻어먹고 내가 이 자리에 왔으면 내가 참 덜 억울하겠는데 이게 뭐하는 짓들이냐 이렇게 얘기한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그야말로 전두환 일당이 조작을 해놓고 야비하게 또 거기다가 어린학생들을 강요해가지고 법정에서 거기에 맞는 진술을 시킬려고 했다,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최근에 무죄로 재심청구..)

지금 이제 무죄가 재심에서 무죄선고가 됐죠. 저 경우는 2007년 7월 13일에 재심에 서울고등법원에서 이제 무죄선고가 됐습니다.

(당시 79년도 12.12에 대해 양김씨는 몰랐나)

이렇게 보셔야죠. 이제 10.26사태가 일어나고 당시 신민당이 국회등원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이 됐기 때문에 그런데 이제 10.26사태가 일어나니까 그날 마침 저희가 윤보선 전대통령집에 복학생대표들이 한 10여명이 찾아뵜는데 마침 김영삼총재께서 그집엘 오셨어요. 어른을 뵌다고.

두분이 한참 말씀하신 다음에 저희가 거기 잠깐 들어가서 총재님 그 신민당이 무조건 등원하기로 하신 모양인데 무조건 등원하는거는 문제가 있지 않느냐, 조속히 총선을 치르도록 헌법을 개정하고 총선을 치르도록 뭔가 이 합의를 한 다음에 등원하셔도 늦지 않지 않느냐 그랬더니 무조건 등원방침 굳히신거 같았어요.

그리고 김대중씨는 당시에 저희가 이제 이건 도저히 이대로 놔둬가지고는 우리 의사표시를 제대로 할 수가 없으니 뭔가 집회를 열어가지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후임자를 뽑는거는 안된다는 무슨 의사표시를 해야겠다 해서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11월 24일날 명동YWCA에서 일어난 위장결혼사건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집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김대중씨가 자기 큰아들을 보냈어요. 광화문에서 이부영 뒤에 국회의원 하신 이부영씨하고 저하고 광화문에 있는 어떤 제과점에서 큰아드님하고 만났더니 그분 말씀이 아버님께서 군부의 여러 가지 사태가 우려되니 자극하는 행동은 좀 삼가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이제 우리가 뭐라 그랬냐면 이거는 어디까지나 재야세력이 독자적으로 하는 일이고 그 김대중씨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생각이 다르다, 이미 군부가 지금 쿠데타를 일으킬려고 다 준비를 하고 있는거 같은데 가만 있는다고 쿠데타가 안일어나겠느냐, 그러니까 투쟁을 해야된다, 쿠데타를 하지못하도록 거기에 참여하지 못할 입장이라면 가만히나 계시라, 뭐 하지마라, 하라 이런 말씀이 적절하지 않다 이렇게 해서 이제 서로 헤어진 일이 있습니다만은 우리 재야에 그당시 입장은 쿠데타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되있기 때문에 강력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쿠데타를 막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쿠데타 일어난 다음에도 투쟁할 명분이 약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적인 그 어떤 투쟁을 하기 위해서라도 희생을 무릅쓰고 군부세력에 대해서 투쟁하겠다 이런 입장이었고 정치인들은 생각이 달랐던거 같에요. 이건 잘 요리하면은 사태를 피해서 어떻게 하든 그 선거를 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거 같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잡혀갔던게 며칠인가)

그게 80년 제 기억에 6월 17일이죠.

(그때 서울역회군 밖에 있었나)

밖에 있었죠. 저는 회군을 반대했습니다. 남대문에서 대치했을때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충돌해야 된다고 주장을 했고 그리고 제가 서울역에 가서 지휘를 하더라도 이걸 절대로 회군하면 안된다, 전두환 세력하고 정면으로 충돌해가지고 수천명이 감옥가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그렇게 해야된다, 그게 뭐 나중에 재판과정에서도 그게 나오는데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더라도 투쟁을 해야된다, 그것만이 군부쿠데타세력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길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는데 복학생들이 나중에 거의 다 빠져버리고 또 이 재학생들이 시위를 며칠하다보니까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그 사태를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을 했던거 같에요.

그래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지휘를 한다고 하다가 그냥 그 어마어마한 군중이 모이고 그러니까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이제 퇴각을 하는 그런 사태가 벌어졌죠.

그리고 그 퇴각의 뒷사태는 뭐냐하면은 엄청난 탄압이고 그리고 광주의 학살 일어난거죠. 그래서 이제 그당시에 제가 이제 그 자리에 현장에 나타날 수 없었지만은 지명수배 상태였고 또 굉장히 그 군부쪽에서 노리고 찾고 있었기 때문에 행동이 아주 부자유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6월 17일날 체포되기까지 예를들면 지금 알려지지 않은 일들입니다만은 5월 18일날 광주에서 충돌사태가 일어나고 학살이 진행되면서 어떻게 그 학살현장의 사진들이 서울로 이렇게 밀반입이 됐습니다.

당시 말하면. 계엄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그것이 제손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것은 물론 칼라로된 사진들입니다. 아주 참혹한 시신들이 막 훼손되고 아주 참혹한 사진들인데 그게 제 기억에 한 50~60장 된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거를 시내복사집에서 도저히 복사할 수가 없어가지고 제가 아는 외국인을 통해서 다른데서 어떻게 요령껏 복사를 해가지고 전단을 만들어서 나중에 인천에 구청장을 지냈습니다만 박우섭씨나 이런분들이 주동이 되가지고 소규모의 인원으로 용산역이나 무슨 이런 고속터미널 몇군데에 광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전단을 살포를 했습니다.
근데 나중에 체포될때 그 사진이 같이 압수가 됐어요. 제가 잡혀가는 집에서 그 사진이 나왔는데 합동수사본부 사람들이 이 사진이 어디서 났냐, 큰일나지 않습니까. 이게 지금 그 사진이 입수된 경로를 추적하면 많은 사람이 희생될거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그걸 숨길라고 아주 몹시 고생을 했습니다.

결국은 그 고문을 당하면서 생각해낸게 외국사람을 하나 중간에다 넣서 내가 받았다 그러면 이놈들이 찾아내지 못할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가지고 마침 그 교도통신 기자였던 하야시 겐이치로라는 사람이 추방을 당했어요.

광주사태에 대한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그래서 제가 마침 그사람하고 친분이 있고 잘 지냈기 때문에 하야시 겐이치로가 추방을 당하게 됐는데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싶다고 그래서 이태원에서 만나서 사진을 받았다 이렇게 이제 꾸며대니까 이친구들이 말이 되지 않습니까.

일본기자가 줬다니까 우선 사진을 촬영했다는게 말이 되고 또 줬다는게 말이 되는데 일본에 가있으니 이사람을 확인할 도리는 없고 그래서 이제 결국은 조서에는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렇게 어물어물 넘어갔고 나중에 하야시 특파원이 한국에 오지 못했습니다. 몇 년동안, 한참동안.

제가 미국에 이제 망명생활을 하면서 83년에 미국에 가서 87년까지 망명생활할 때 이사람이 마침 워싱턴지국장으로 와있어요. 하도 미안해서 제가 밥을 같이 먹었습니다. 먹으면서 하야시상 말이지, 너 왜 한국에 못가는지 아냐, 그러니까 나 옛날에 추방당해서 못가는지 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사실은 광주에서 참혹한 사진이 수십장 내손에 왔는데 그걸 다 밝히면은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겠길래 니가 나한테 주고 추방당했다고 얘기했다, 아마 군부가 그것 때문에 너한테 굉장히 분개하고 있을거다 그러니까 내가 참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둘이 뭐 다 지난 일인데 어쩔 수 있냐 하고 웃은 일이 기억이 납니다. 하야시 겐이치로 특파원이 한국에 있을때 물론 상당히 재야의 취재도 많이 하고 그랬습니다만은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사진은 누가 찍었는지 몰라요.

2. 신군부가 등장해서 5공화국때까지는 징역에 있었고 그다음 미국망명가서 국내에는 없었네요

그러니까 그때 구속돼가지고 82년 12월 24일날 형집행정지로 출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뭐 12년 받았던걸 9년으로 감형하고 또 8년으로 감형하고 그다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을 했는데 하루는 진주에서 감옥을 사는데 교도소 간부들이 불러요.

그러더니 지금 날짜도 잘 기억이 안나는데 대통령 각하께서 특별히 징역9년을 징역8년으로 감형하셨다고 그래서 이양반들아 그걸 무슨 애들 장난하냐, 이게 지금 9년이고 8년이고 무슨 차이가 있냐,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임기가 지금 뭐 6년인가 밖에 안된다는데 9년이면 어떻고 8년이면 어떠냐 그거 도로 안받는다고 그 위쪽에다 얘기하고 취소시켜라 그러고 한참 웃은 일이 있는데 그래서 이제 9년형을 이제 집행을 하다보니까 82년 12월 24일까지 한게 한 2년7개월 되요. 형집행정지로 나왔으니까 6년정도가 남은거죠.

그러고서 이제 83년 제가 2월 16일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왜 떠났냐하면은 저도 물론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가 없고 우선 뭐 사는거 자체가 아주 어려운 상황이 됐고 또 말한마디만 하면 와서 잡아넣겠다 다시 잡아넣겠다고 그래서 도저히 한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겠다 결론을 내렸습니다.

석방돼서 그날 기독교회관에서 석방자환영회가 열렸는데 그 환영회 석상에서 제가 이제 그 여러 가지 그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 좀 상당히 심한 소리를 좀 했어요. 했더니 그다음날 서부경찰서 정보과장이 찾아와가지고 다시 한번 그런 말씀을 하시면 형집행정지를 취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 이나라에 더 이상 살기 싫으니까 전두환이 밑에 살기 싫으니까 그럼 날 내쫓던지 도로 집어넣던지 둘중에 하나해라, 사람 말도 못하게 하면서 어떻게 날보고 이나라에 살란 얘기냐 이러고 한참 싸운일이 있습니다.

근데 제 딸애가 제가 지명수배중일때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처가에서 출생을 했는데 이러다보니까 한 3년동안 아버지를 얼굴을 못본 사태가 되버렸어요. 그래서 이제 그게 한두해는 괜찮았는데 한 3년째 되니까 미국에 국회의원들이 상원의원, 하원의원들이, 또 인권단체들이 세상에 이런일이 어딨냐 하고 막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유력일간지에도 보도가 되고 텔레비전에 뉴스가 되고 상하원에 유력한 의원들이 부녀상봉을 시켜라 하고 이제 편지하고 그러니까 일단 가서 만나고 와라 처음에 이제 단수여권을 줘가지고 1년짜리 단수여권을 줘서 겨우 이제 방문여권을 줘서 미국으로 내보냈던거죠.

저도 이제 도저히 뭐 여기 어떻게 활동도 할 수 없고 살 수가 없으니까 미국에 나가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해외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이제 미국으로 나갔어요. 나갔다보니까 김대중씨는 이제 12월 23일날 출감해서 바로 미국으로 가버렸고 저는 이제 2월 16일날 갔으니까 가서 뭐 자연히 이제 미국에서 합류를 하게 된 셈이 됐죠.

(그때는 같은 지역에 있었나)

저는 이제 로스엔젤레스로 갔습니다만은 김대중씨는 물론 이제 워싱턴 지역에 남쪽에 있는 행정구역상은 버지니아주입니다만은 워싱턴 수도권이라고 볼 수 있는 지역에 자릴 잡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서 한 2월말쯤에 뉴욕에서 무슨 강연회를 한다고 오라 그래서 거기가서 처음 만났죠.

그리고 제가 한 6월경에 워싱턴으로 옮겼습니다. 활동을 할려면 아무래도 수도에 가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미국인들과 연대해서 활동을 해야되기 때문에 미국의 비영리단체중에 국제정책개발연구소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지금도 있습니다만은 그단체에 제가 선임연구위원으로 서로 얘기가 돼서 6월달부터 거기가서 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 워싱턴으로 이주를 하게 되죠. 저는 이제 저도 사는곳은 사무실은 국회의사당 옆에 있었습니다만은 사는 곳은 이제 버지니아에서 출퇴근을 하다가 나중에 메릴랜드쪽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DJ 미국에서의 망명투쟁에 대해 소상히 알고 계시겠네요)

자연히 이제 워싱턴 지역에 있는 뉴욕이나 워싱턴 일원에 있는 인사들이라는게 그당시 한국에서 간 인사들로서는 문동환 목사 계셨고 그다음 한완상 나중에 적십자사총재 됐습니다만은 한완상씨가 계셨고 뉴욕에 계셨고 그리고 한국에서 오래전에 갔던 몇분이 계셨고 제가 합류를 한거죠.

그리고 상당히 실무적인 일들은 지금 고인이 됐습니다만은 최성일교수라고 유명한 우리나라 여배우인 김신재씨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납북된 최인규감독이었고 지금 뭐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분이 아주 영어가 유창하고 동시통역을 김대중, 김영삼 두분의 하버드대학 강연이라든가 이런거는 동시통역하신분이 이분입니다. 이분이 이제 일종의 사무총장역을 하시고 그래서 한국에서 어떤 분이 오신다든가 중요한 일이 있으면은 김대중씨 사무실에서도 회의를 하게 되고 또 뭐 보스톤에서도 회의하게 되고 이런 일들이 있었죠.

그것이 나중에 미국에 국민회의라는게 하나 조직돼있어가지고 일종의 교포 민주화운동단체인데 그 단체를 중심으로도 했고 그리고 김대중씨는 독자적으로 또 인권문제연구소라는 자기사조직을 결성을 했습니다. 저는 뭐 거기엔 가담하지 않고..

3. 신군부가 10.26이후 12.12, 5.17, 5.18, 체육관선거, 전두환 대통령, 민정당 쭉 보면 굉장히 치밀했다 생각이 드는데 DJ나 YS도 오판하고 있을만큼 무게력이 없다 보여지는데 그에 대한 평가를...

그게 당시에 이제 우리 재야세력 내부에서도 그런저런 논의가 많이 있었습니다만은 저는 이제 그당시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남미나 다른 나라를 볼때 지금 박정희 정권을 우리 힘으로 무너뜨린거라고 볼 수가 없다,

지금. 측근세력의 어떤 이반에 의해서 우리가 물론 투쟁해서 일어났습니다만은 측근세력의 이반에 의해서 내부에 소위 그 변고가 일어나서 최고권력자가 제거되는 그런 사태가 났는데 이제부터 치열한 투쟁을 해서 후속쿠데타를 막지 않으면 그럼 이나라는 다시 군사정권하에 들어서게 된다, 이게 이제 저나 몇몇사람이 본 입장이었고 정치권에 아주 가까이 지내던 인사들은 아니다, 이제는 박정희가 죽었으니까 이제 당연히 많은 사람 김대중씨 편이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는 그런 순서로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을 했고 그러나 기성정치권 사람들은 또 김영삼씨 세력이 많았으니까 그분들은 무슨 소리냐 우리도 유신반대투쟁을 원내에서 열심히 했는데 신민당이 중심이 돼서 정권을 잡아야 될거 아니냐 이런 생각을 했으리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다보니까 저나 이제 몇몇사람들은 치열한 투쟁을 하기 위해서 위장결혼사건같은 집회를 해서 우선 그 핵심적인 사람이 모여서 이 군부에 의한 계속적인 통치는 있을수가 없다는걸 분명히 못을 박고 넘어가자 이렇게 된거고 그리고나서 12.12반란사태가 일어났는데 그게 나고서도 많은 사람들이 낙관론이 상당히 팽배해있었어요.

저는 아주 굉장한 비관론자였는데 당시에. 이거는 소위 군부쿠데타가 이미 일어났고 12.12반란으로.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쿠데타라는건 다만 이걸 제도화하는 그런 그 소위 아까 말씀드린 =컨설리데이팅= 쿠데타라고 헌팅턴 교수가 아마 그런 용어를 썼을 겁니다.

남미의 군사정권 분석하면서. 그래서 그런 사태가 올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내년봄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치밀하게 준비를 해서 봄에 아주 과감한 투쟁을 통해서 우리가 이기든지 아니면 우리가 지더라도 그것을 다시 이길 수 있는 도덕적인 어떤 정치명분을 우리가 축적을 해가지고 다음에 투쟁을 준비해야된다, 그게 이제 저나 몇사람의 논리였는데 워낙 그 우리 복학생중에도 김대중씨와 가까운 분들이 상당히 있었어요. 이분들은 또 굉장히 어떤 면에선 조금만 잘 투쟁하면은 그런 그 김대중씨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수 있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었어요. 또 그렇게 움직인 사람들도 있었구요.

(서울의 봄에 대해 명확히 달랐네요. 바라보는 입장이..)

그렇죠.

4. 신군부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도덕성을 떠나서 그사람들의 전략전술이나 그이면의 과정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한다면...

박정희가 길러낸 친위세력들이 군부에 뿌리를 박고 있다가 다른 세력이 정권잡는걸 결코 용납할 수 없으니까 이제 쿠데타 일으킨거 아닙니까. 그게 이제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실체고.

근데 이제 그 YWCA사건이 11월 24일인데 제가 11월 26일경인가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지명수배가 된걸 눈치채고 제가 피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잡혀가는 순간에도 명동에서의 그 잡혀가는 현장에서의 폭력이라는게 아주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 현장에 저는 이제 명동파출소앞에 시위대를 조직하기 위해서 거기 대기하고 있었는데 현장에 들어갔다가 위장결혼식 시작되기전에 밖으로 나와가지고 명동파출소 앞에 가서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안에 사람들이 밀려나가면서 하는 얘기가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다는거에요.

그래서 이제 이게 뭐 심상치 않구나 하고서 거기서 대오를 정비해서 한 200여명 됐던거 같에요. 거기서 이제 동아일보사앞에 광화문지국쪽으로 해서 이렇게 시위를 하다가 해산을 했습니다.

근데 잡혀간 사람들에 대한 고문이 아주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고문하는 내용이 뭐냐하면 김대중이가 시켰다고 자백해라 이게 이제 =일이고= 그래서 김상현 전의원 같은 경우는 아주 그때 후유증인지 모릅니다만 눈수술까지 나중에 하시게됐고 백기완씨 같은 경우는 아주 폐인이 되다시피 사경을 해매는 상태가 됐다 겨우 =전지요양을= 거듭하다가 이제 살아나는 그런 일이 됐고 거기 잡혀갔던 우리 복학생들은 초죽음이 되가지고 나중에 그사태를 제가 나중에 듣는데 아주 끔찍하기가 짝이 없는 상태였어요.

뭐라고 했냐면은 발표문에 보면은 마지막 회합을 김학민이라는 사람 연대복학생인데 김학민씨 집에서 마지막 점검회의를 했어요.

누구는 요런 역할하고 누가 =비회를= 입고 누가 부조돈을 받고 누가 장례를 어떡하고 앞에 시위는 누가 이렇게 이렇게 앞에 선다 마지막 점검을 하는데 제일 마지막에 제가 이제 여기 이제 앞에 먼저 역할맡은 사람들은 감옥에 가게 될텐데 얼마고생 안할테니까 먼저 가서 고생을 해라, 그대신 나나 여기 몇사람 남아서 봄에 투쟁을 준비하고 또 앞에 서야 되니까 이 자리에서 분명히 우리끼리 합의하자, 이 자리에 나하고 누구누구는 없었던거다 이렇게 얘길했어요.

얼마나 맞았는지 심지어 이렇게 발표했단 말이에요. 이신범은 마지막 점검회의에서 자신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으로 하라고 지시하고 그게 나왔어요. 그정도로 아주 참혹하게 고문을 했어요.

그 사태를 보면서 야, 이거는 이게 이사람들이 민주화운동한 사람들을 정말로 자기네가 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헌정질서를 다시 만드는 그런 그 하나의 과도적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다면은 어떻게 이 고생한 이 민주화운동한 사람들을 이렇게 다룰수가 있느냐, 거기다 윤보선 전대통령이 당시 연세가 상당히 높았는데 이분을 또 법정에 끌어다놓고 재판을 했어요. 함석훈 선생하고.
그런 사태를 보면서 이거는 이건 아니다, 이사람들은 우리하고 전혀 다른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을 했죠.

그리고 12.12사태때 국방부앞에서 유혈쿠데타를 일으킨걸보고 지금 무슨 마치 뭐 자기들은 그게 희생이 별로 없이 무혈쿠데타를 일으킨 것처럼 얘기하지만 국방부 올라가는 비탈에 말이지, 피가 그냥 흥건히 흘러가지고 무슨 적군 사살한 것처럼 아군에다 대고 마구 총질을 해가지고 그런 사태를 일으켰거든요. 그러니까 권력에 눈이 멀어가지고 보이는게 없었던거죠. 물론 뭐 자기들로 봐서는 생사의 어떤 갈림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했겠습니다만..

5. 그 이후 광주항쟁 발포명령자는 아직도 가려지지 못했는데 문민정부 시절에 재판할 때 처음 기소되서 사건수사가 됐는데 그때 국회 계셨던 시절인데 왜 못밝혀진건가.

결국은 발포명령이라는게 문서로 내려간게 아니고 자기들끼리 일종에 음모를 같이 한 집단속에서 구두로 전부 이뤄졌을 거기 때문에 증거가 아무것도 없는거에요. 거기서 못밝힌거죠. 보통은 사실은 군사작전 같으면 그런 뭐 개전명령이라든가 무슨 이런게 다 문서로 남아있을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경우는 뭐 완전히 무슨 쿠데타를 공모한 집단들끼리 자기들끼리 그냥 필요하면 쏴라 이런식으로 내려왔을테니까 결국은 뭐 추정컨대 발포책임자는 전두환이다 그거는 다 아는거지만 그걸 뭐 법적으로 증거가 이렇게 밝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전에 얘기에 덧붙인다면은 12.26사태가 나고 11월 24일까지 사이에 굉장한 억측과 루머와 뭐 여러 가지가 떠돌아 다녔을거 아닙니까. 김재규가 같이 일했던 군인들이 남아있어서 군인군부속에 민주화 알리는 세력있다는 그런 여러 추측도 있고 뭐 그럴듯한 얘기도 떠돌았고 일부에선 그게 아니다 이게 지금 뭔가 이상한 군대내 조직이 있어가지고 뭔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 있다 이런 이제 논의가 많이 있었죠. 그런 추측이.

12월 24일에 YWCA사건에 대한 참혹한 진압이 거기서 그런거를 다 이제 하나로 통일시킨겁니다. 아, 이거는 뭔가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허세였다는게 12월 12일날 드러났고 실세가 이제 거기서 전두환 일파가 등장을 해가지고 80년5월17일날 정권을 장악하는 국보위라는 =이름통해서= 정권을 장악하는 사태에 이른거죠.

국보위를 무슨 법적근거로 설치했느냐 나중에 문제가 됐지 않습니까. 당시에도 그게 문제가 됐죠. 자기들도 뭔가 발표를 해야될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계엄법 제1조 시행령에 의해서 설치했다, 국보위를. 시행령에 의해 설치된 기관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대행하고 말이 안되는 어거지 논리를 갖다 대가지고 이제 쿠데타 정당화할려고 했던거에요.

6. 당시 미국에 83년2월 16일날 갔는데 미국이 이 시절에 어떻게 개입했느냐, 제대로 안밝혀져있는데 신군부 출현, 광주항쟁시절 미국의 역할은 어땠나

나중에 뭐 재야세력이나 학생운동에서 미국이 전두환이를 편들었다 이렇게 그런 인식이 널리 퍼져가지고 반미감정이 일어난거 아닙니까. 근데 미국이 뭐 적극적으로 저는 지원했다고 보진 않아요. 소극적으로 이렇게 사태가 일어났다면 어쩔 수 없이 그걸 묵인하고 수용하고 하는 그런 사태가 반복된게 아니냐, 적극적으로 그걸 저지할려고 했거나 무슨 그 유효한 정책수단을 통해서 그다음 사태를 못일으키게 할려는 그런 역할을 못했던거 같에요.

미국이 그 어떤 그 외국정치의 그 중남미 빼놓고는 직접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그런 어떤 입장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리고 한국군부내에 어떤 =역관계에서= 미국에 힘의 한계가 있었던게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하죠.

저도 이제 미국에 가서 여러 토론회나 강연회 같은걸 통해서 미국이 한국국민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데 대해서 반성을 하고 비판도 강하게 많이 했는데 또 제가 도착하자마자 기자회견을 할때 당시에 미국문화원방화사건으로 구속되있던 김현장씨에 운명에 대해서 사형선고가 아직 감형이 안된 상태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래서 그사람 사형을 집행해선 안된다고 이제 강하게 제가 얘기해서 당시 보도도 되고 그랬습니다.

어쨌든 미국의 역할에 대한건 앞으로도 뭐 더 많은 기밀문서가 공개되고 그러면 30년이 되면 많은 문서를 공개하게 되있으니까 올해, 내년에 많이 공개되는 해니까 아닙니다. 더있어야 되나요? 30년까지 아마 올해, 내년 아마 공개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많은 진실이 밝혀지겠습니다.

어떻든 당시에 =글라이스틴= 대사가 뒤에 제가 =글라이스틴= 대사하고 개인적으로도 만날 기회가 그래서 이제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저한테 깊은 얘길 물론 밝힐 입장은 아니었겠습니다만은 외교적인 언사로 그건 한국사람들끼리 문젠데 자기네가 하는데 한계가 있지 않느냐, 이런 대답만 계속들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데 협조라든지 우호적이었나)

미국이란 나라는 뭐 그런데 대해서 외국사람들이 와서 합법적인 신분만 가지고 있으면은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 나라니까. 공산주의 활동을 하지 않는한, 그리고 또 폭력을 옹호하고 주창하는 일을 하지 않는한 크게 뭐라고 하지 않는 나랍니다.

근데 처음에 갔을때 제가 여기서 단수여권에 방문사증을 가지고 이제 입국을 했는데 가족도 거기있고 또 미국에서 활동을 해야 되니까 합법적인 체류신분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영주권을 신청을 해서 취득하게 됐는데 영주권을 이민국에서 주질 않는거에요. 왜 안주느냐 그러니까 이민관 얘기가 자기가 많은 외국사람들한테 영주권심사를 했는데 당신처럼 전과기록이 많은 사람을 처음 봤다, 12갠가를 지문기록을 한국정부가 통지해왔다는..전두환 정권에서 영주권을 가지게 되면은 활동이 상당히 자유로와지니까 이걸 막기 위해서 아마 그랬는지 지문을 12개를 통보를 했어요.

한국의 지문기록이라는게 처분결과는 없이 그냥 구속된거 뭐 이런거만 쭉 나열돼있으니까 이민관이 제 여권에다가 노동허가라는걸 찍어주고 영주권을 줄 수 없다고 이제 얘기를 해요. 노동허가라는건 안에서 일할 수 있지만 외국에 한번 나가면 다시 못들어오는거에요. 그래서 나 이거 안받겠다고, 그러고 이제 미국 워싱턴에 가서 국무부에 갔습니다.

가서 한국과에 가가지고 아니 이거 이민관이 이걸 안주는데 당신나라 미국의 입장이냐, 미국의 입장이라면은 내가 돌아가마, 내가 뭐 굳이 여기있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랬더니 그게 무슨소리냐고 자기네가 전화하겠다고 이민국에 전화를 해가지고 이제 정치범이니까 예외조치를 해라, =웨이버라고= 그러죠. 국무부장관이름으로만 할 수 있는 조치입니다. =웨이버를= 줘가지고 제가 영주권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뒤에 제가 하는 활동에 대해서 이러고저러고 여러 가지 이런저런 말을 한 적은 없고 다만 1987년 7월 10일날 제가 미국에서 출발하기로 한국 일단 귀국하기로 발표를 했습니다.

그때 6.29선언이 나고 사면복권조치가 곧 있을거다 요렇게만 예고가 되있었는데 날짜는 모르니까 그냥 7월10일날 내가 그럼 한국에 일단 귀국하겠다, 미국하원의원도 있었고 미국의 의원보좌관들이 미국기자도 있고 이랬는데 국무부에서 전화가 왔어요. 미국 국무부에서. 한국과에 좀 와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제 갔더니 거기 이제 관리가 이건 좀 요청을 하고 싶은데 귀국을 연기해달라, 이유가 뭐냐 그러니까 지금 니가 귀국하게 되면 형집행정지상태인데 공항에서 체포되기라도 하면은 이것이 전세게언론에 보도가 되가지고 6.29선언에서 민주화를 약속해놓고 이건 완전히 제대로 하는게 아니지 않냐 하고 부정적인 여론도 일어나게 되고 상당히 물의가 빚어질 수 있으니 좀 한두달만 귀국을 연기해달라 그래서

난 그렇게 못한다, 나 그냥 그날 예정대로 떠나서 11일날 서울에 도착할테니까 잡아넣고 싶으면 잡아넣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서 이제 그랬더니 7월 10일자로 사면복권이 됐어요. 일단 형집행정지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보니까 또 다른 옛날건 안해놔가지고 결국은 피선거권은 회복이 안됐습니다만 어떻든 7월10일날 떠나서 여기 돌아왔습니다.

돌아올때 지금 미국대사로 와계시는 캐서린 스티븐스가 2등서기관이었는데 공항에 이제 제가 하원의원하고 같이 오니까 절 마중 나온게 아니라 하원의원 마중나왔죠.

그래서 같이 외교관 통로로 일행을 나가게해서 같이 나온 일이 있는데 미국에 있을때 물론 국무부에 부임한 한국과에 오신 분들이 저한테 와서 이제 여당입장이 아니라 재야의 입장을 좀 이해하고 가고 싶다고 와서 자문을 구하거나 이런일은 있지만은 제가 무슨 활동을 하는데 이건 했으면 좋겠다 안했으면 좋겠다 단속은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이제 언론에 많이 자주 이제 회견도 자주 했고 텔레비전에도 많이 인터뷰에 나갔고 또 미국외에도 자주 갔었기 때문에 이분들이 제가 하는 말에 다 동의하진 않았겠지만 미국이란 사회는 그런 다원사회니까 그런데 대해서 이러고저러고 한일은 없습니다.

7. 85년도에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는데 그전에 DJ가 입국하게 되는데 왜 같이 안들어왔나

도쿄까지 같이 왔죠. 제가 이제 그 김대중선생안전귀국을 위한 단장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앞에 그 리더는 =로버트 와이트= 미국의 전주엘살바도르 대사였고 또 =에드페이안=이라는 오하이오주 출신 하원의원이 단장대표로서 두분이 서고 안전귀국단이 한 30여명 됐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뭐 =패트릭샤 데리안=이라는 카터 행정부의 인권차관보를 지낸분, 또 =리제독이라고 수륙양용전단의= 사령관을 하신분, 전직 의원 뭐 유명한 피터폴앤메리의 가수 메리 그분도 꼈고 제가 이제 실무단장역할을..실무책임자라고 그러면 되겠죠. 단장이라기보단.

그래서 실무책임자격으로 귀국동행단을 수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그 84년 말엽에 보스톤에서 김대중씨가 그당시에 미국에 체류하던 한국출신재야인사들 또 미국의 교포들 중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던분 몇분해서 지금 기억이 한 열댓분 된거 같에요. 보스톤의 한 호텔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귀국문제 어떡할거냐, 아키노가 귀국하다 사건이 난 후 아닙니까. 일단 본인입장이 귀국을 만류한 사람도 많이 있었는데 본인입장이 뭐 귀국하겠단 입장이 확고했어요. 본인이 가겠다는데 안전하게 귀국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냐 해가지고 준비를 좀 하자 이렇게 돼서 마침 제가 있던 미국단체 국제정책개발연구소에서 실무적인 미국사람들을 조직하는 실무적인 역할을 하자, 이렇게 돼가지고 제가 이제 그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제 귀국동행단을 만드는 일을 제가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 교섭하는일, 홍보하는일, 그다음에 거기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는일 그래서 미국의 재단에서도 시카고에 있는 한 재단에서 제가 한 2만달러를 모금했고 교포들한테선 뭐 소액이지만 조금했고 미국분들이 모금을 해줘서 돈을 모아가지고 한 30여분 저명한 미국인사들을 거기 이제 동행단으로 해가지고 가자 이렇게 돼서 오는데 미국에서 출발하면 한국에 밤에 도착하게 비행기시간이 되게 되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래가지고는 이거 안되겠다 싶어가지고 위험하다 해서 김대중씨가 일본에서 하루를 체류하고 가자, 그렇게해서 이제 6일날 미국으로 출발해가지고 7일날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다음에 그앞에 할리데이인이라는데 이제 하루를 묵고 8일날 아침비행기로 한국으로 일행이 가게 됐습니다. 일본정부에서 난처하니까 할리데이를 =임시보세구역으로= 지정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에 상주한게 아니고 다만 그 =보세구역에= 잠시 머무는게 돼서 거기서 있는데 당시 이제 수행한 사람중에 이근팔이라는 분이 외교관을 하다 망명한 분인데 김대중씨의 비서실장이었습니다. 그분은 아예 한국여권이 없어요. 망명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도쿄에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제 경우는 형집행정지상태인데 돌아가면 다시 출국할 수가 없고 그래서 김대중씨도 절보고 워싱턴에 남아서 미국의회나 언론을 상대로 민주화운동세력을 좀 대변하는 여러 가지 역할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셨고 또 당시 대사관에 나와있던 안기부책임자가 김포에 제발 좀 내리지말아달라, 자기들 입장이 아주 난처해지니까 도쿄에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돼서 이제 도쿄에서 정식입국도 못하고 가상륙허가증이라는걸 발급받아가지고 하루를 있다가 미국으로 전 돌아가게 됐습니다.

8. 당시에는 DJ한테 큰역할 했는데 87년 돌아와서 통일민주당 정책실장을 한걸로 알고 있다, YS와 관계가 시작됐는데 그렇게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이제 조금 앞에 설명을 좀 드리면은 제가 83년 2월에 미국에 가서 김대중씨가 귀국한 85년 2월까지 사이에 한 2년간을 워싱턴지역에 같은 지역을 근거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그분이 집에서 주말되면 동지를 오라 그래서 밥도 같이 먹고 이러니까 만나게 되고 또 행사때도 만나게 되고 중요한 일이 있을때는 또 몇분이 한국에서 오신분들 모아서 의논을 하니까 자연히 이제 자주 만나게 됐는데 제가 그때 그 한국에서 오신 분들중에 몇분이 저한테 아주 강력하게 말씀하신게 있어요.

절대로 활동경비나 생활경비를 김대중씨한테 얻어쓰거나 신세지지마라, 앞으로 우리는 독자적인 재야세력의 어떤 그 입장에서 활동을 해야지, 한 정치인에 이렇게 같은 그 어떤 뭐라 그러나 상하관계가 되있는 그런 입장이 돼선 안되겠다 그래서 제경우에 그분한테 한국에서간 재야학생운동 민주화운동 출신으로서 어떤 하나의 동지적 관계에서 일을 했지, 무슨 그분과 어떤 상하관계가 있거나 어떤 주종관계가 있어서 일한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근데 어떻든 같은 지역에 있고 같은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사이에서 그야말로 사심없이 헌신적으로 그분하시는 일 돕고 또 그분도 저를 그렇게 대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85년9월2일부터 김영삼 총재가 당시에 그분도 당시에는 야인이죠. 워싱턴을 방문했어요. 워싱턴에 저는 이제 상당히 활동을 한 경우니까 워싱턴지역에 교포사회도 =반이상당이= 생겼고 활동기반이 생겼고 또 의회나 언론에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저한테 좀 활동을 도와달라 그래서 제가 그때가 굉장히 날이 무더웠습니다.

9월2일인데 한 35도 되는 무더위에 버지니아의 한 고등학교를 빌려서 강연회도 개최를 하고 거기 뭐 현수막 다는 일에서부터 여러 가지 제가 직접 다니면서 사람들 몇 명하고 같이 했는데 워싱턴포스트에 전면인터뷰가 났는데 그것도 제가 이제 찾아가서 =돈오브도퍼= 기자한테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김영삼씨랑 자기가 해야된다고 그래서 이제 한면을 파격적으로 할애해준 인터뷰도 했고 유력한 언론인터뷰를 제가 주선을 하고 의회면담도 많이 그렇게 하면서 같이 따라도 다니고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그분 왔을때 제가 정말 민주화의 한 동지고 지도자로서 사심없이 그렇게 도와드렸고 그다음에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오셨는데 그게 86년 5월 중순이었어요. 그때 그분이 뭐 여러 가지 말이 많았어요. 뭐 노선이 불투명하니 무슨..

(이민우 파동..)

예. 그러나 어떻든 신민당 총잰데 당시에 신민당이 영어로 NKDP입니다. =코리아데모크라틱파티인데= 워싱턴지역에서 NKDP는 아주 굉장한 그 민주화운동의 구심체로서 많이 알려져있어요. 미국정계에. 그래서 이민우 총재가 워싱턴에서 활동하는거 저희가 도와드릴일이 없느냐 그래서 조금 도와드리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무슨 말씀드릴라고 그러냐면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어디까지나 청년학생운동 출신으로서 독자적인 입장에서 하나의 그 민주화운동의 한 요소로서 일을 할려고 그랬지, 어느 정치인의 주종관계에 있을려고 하지 않았고 또 철저하게 그걸 피할려고 애를 썼다 이런 말씀드리고 87년 7월 11일날 제가 귀국을 해서 한 일주일 사이에 일행과 같이 동교동도 가고 상도동도 가고 그러면서 일정을 잡았는데 두분이 입장이 굉장히 달랐어요.

비로소 이제 지금 말씀드릴 수가 있는데 김대중씨는 어떤 입장이었냐면 저를 보고 단둘이 앉아있는데 지금 민주화가 된게 아니다 쿠데타가 다시 일어날수도 있으니 워싱턴을 그래도 알고 의원들하고도 얘기가 되고 여러 가지 동지들 좀 가서 대변하는데 역할할 수 있는 사람이 이동지 아니냐, 그러니까 빨리 귀국할려고 그러지말고 다 이런 민주화과정이 이루어질때까지 워싱턴에 머무르면서 일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이게 이제 그분의 입장이에요.

선생님 저는 생각이 다르다, 제가 이제 와서 이제 국내에서 활동해야지, 더 이상 어떻게 외국에 있겠느냐 이렇게 말씀을 드렸고 상도동에서 김영삼씨가 아침을 먹으러오라고 사람을 보냈어요. 그래서 아침을 먹으러 갔는데 단둘이 아침을 먹는데 이분은 그냥 신민당 입당원서를 주면서 그당시 통일민주당이에요.

신민당은 이민우씨가.....이제 정치활동을 해야되니까 빨리 입당을 해가지고 이렇게 지구당도 맡고 그래야된다고 이제 빨리 귀국하라고 더 이상 이제 미국에서 시간보낼때가 아니니까 빨리 귀국해라, 한분은 미국에 있으라 그러고 한분은 빨리 귀국하라 그러고 시국을 보는 눈이 차이가 있는거에요.

제 걱정은 거기에 있던게 아니고 두분이 또 80년도처럼 또 과잉경쟁을 하는게 아니냐 그래서 두분이 어떻하든 단일화를 하셔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두분 다 그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래서 당시에 제가 돌아가서 LA가서 인터뷰한게 한국언론에 나있는데 미국 현지 한국언론에..양김씨 단일화에 아무 걱정할게 없다, 이런 제목이 나있어요.

나중에 보면서 참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다 생각을 했는데 두분이 그런 입장을 보고서 미국에 일단 돌아갔다가 제가 8월말에 가족을 전부 이제 데리고 미국에 있던 생활을 다 정리를 하고 귀국을 했습니다.

귀국을 해서 10월경이 됐는데 두분이 뭐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있으니 양쪽 두분을 가끔 뵙게 됐는데 한번은 김대중씨가 뭐라 그러냐면 자기가 나이도 많고 감옥도 많이 살았고 먼저 대통령을 해야되는데 저사람이 저 김영삼씨가 생각이 다르다 이거에요. 그런 상태가 몇 번 그러다가 당을 따로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이제 평민당을 창당을 한겁니다.

제가 이제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가 지금 수십년을 싸웠는데 두분이 여기서 갈라지면 우리 투쟁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많지 않냐, 그러니 분당하시는거는 이건 안된다, 어떻하든 통일민주당이라는 틀안에서 두분이 후보를 단일화 해야될거 아니냐 이렇게 이제 말씀드렸는데 결국은 분당이 됐어요. 저는 뭐 통일민주당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평민당에 가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보단일화 국민협의회라는게 결성이 됐는데 홍성우 변호사하고 지금 고인이 된 조영래 변호사 이런분들이 해서 사실은 재야쪽에서는 압도적으로 김대중씨와 가까운 분들이 많아서 김대중씨쪽으로 소위 비판적 지지란 이름으로 많이 기울어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숫자가 훨씬 적은분들이 후보단일화 국민협의회를 만들어가지고 성명서도 내고 그러고 있었는데 저도 거기에 이제 이름을 얹어서 거기에 끼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양김씨 쪽에서 다 욕을 먹게 되죠. 입장이 뭐냐 저거는 도대체. 그런 중에 선거운동이 한참 진행중인데 제가 이제 동교동계 어떤 의원님이 와가지고 절 좀 동교동으로 가자고 억지로 끌고갔어요.

거의. 저는 가고싶지 않았는데 바쁜 선거운동 와중에 거기까지 가느냐 그랬는데 갔더니 김대중씨가 4자필승론을 얘기하면서 김영삼씨가 출마하는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 경상도표를 가르기 때문에 4자필승론을 이렇게 아주 숫자까지 써있는 종이를 내놓고서 설명을 하시는거에요. 사모님도 옆에 계셨는데 제가 한참 보다가 거기 보면은 4파전을 하면은 한 100만표 차로 이기는거로 되있어요. 그뒤 설명에.

제가 이게 아닙니다, 이게 우리가 60%고 저쪽이 40%인데 60%를 둘로 나누면 우리는 30, 30이 되고 저쪽은 40이 되잖습니까. 거기다 김종필씨가 나와가지고 저쪽표를 뺏어가는게 아니라 우리표를 뺏어가는게 아니냐 결국은. 그러니까 우리는 30, 30도 안되고 저쪽이 그냥 선거에 이기는 이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느냐 이건 제가 보기에 이게 맞지 않습니다, 이랬더니 절보고 왜 그렇게 소신이 흔들리고 미국에서 와서부터 계속 입장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그렇게 하느냐 이렇게 좀 섭섭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러면 제가 생각하기에 후보단일화가 안되고 결국은 노태우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제가 겪은 느낀 절망감이라는게 얼마나 컸냐 하면은 제가 67년에 대학교에 입학해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한 이래 20년을 싸웠는데 그러고서 4번을 감옥가고 6년 가까이 감옥을 살고 망명생활을 하고 그랬는데 그래 이 수십년 투쟁의 결과가 결국 노태우 정권이었느냐, 그건 정말 아주 그 하늘이 무너지는 그런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지도자란 분들이 이럴수가 있느냐, 그래서 이제 선거가 끝난 한참후에 87년 12월이죠.

한참후에 그냥 위로한다고 김영삼씨 집에를 갔어요. 그랬더니 이분이 눈물을 글썽글썽 하면서 몇가지 말씀을 했어요. 그러고 이제 나오고. 그러다가 어떻게 됐냐면 88년 총선이 다가오니까 그러면 야권을 통합해서 우리가 총선에 임해야겠다, 국회라도 우리가 확실하게 야당이 좀 다수당이 되야되겠다 해가지고 =제정구= 전국회의원 지금 고인입니다만 그분하고 몇분이 해가지고 소위 야권통합운동을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2월경인가에 그당시 통일민주당은 의석이 거의 70석이고 평민당은 23석인가 그랬는데 그건 무시하고 4:4:2로 야권을 통합하자 하는 잠정합의가 암묵간에 됐는데 그것을 깼어요. 평민당쪽에서. 김대중씨 쪽에서 깼습니다. 깨가지고 결국은 야권통합이 안되고 또 그냥 4당이 총선에 참여한 꼴이 되가지고 물론 결과적으로는 호남지역을 석권해가지고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되는 그런 결과가 됐습니다만은 야권이 통합됐더라면 확실한 정국의 주도권을 갖지 않았겠느냐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죠.

그래서 결국 총선은 다가왔고 어느 당인가에 가담은 해야되겠고 해서 또 김영삼 총재께서 선거를 치러보니까 당이 너무 후진적이고 이거 못쓰겠다, 그러니까 좀 미국에서 여러 가지 선진적인 경험을 많이 했으니까 통일민주당에 들어와서 당을 좀 혁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아달라 이렇게 말씀하셔가지고 88년3월 총선직전에 일부인사들하고 입당을 하게됐습니다.

그게 이제 노무현, =김광일, 강신욱= 변호사 이분들하고 제가 같은 날 기자회견을 하고 이제 입당을 했죠. 노무현씨하고 입당동기입니다. 그렇게해서 통일민주당에 들어가게 됐고 저는 이제 복권이 덜됐다고 또 입후보를 못하게 해서 총선에 못나왔어요.

서울에 한 지역구에 내정이 됐었습니다만 못나갔는데 다른 분들은 국회의원이 됐고 그래서 총선후에 정책실장으로 그렇게 직책을 줘가지고 통일민주당 정책실장으로 이제 김영삼 총재를 모시고 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근데 물론 그뒤에 행사장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마주쳤는데 자기하고 아무 의논도 없이 통일민주당에 갔다고 상당히 섭섭하다는 취지로 말씀을 하셨어요.

근데 뭐 이미 다 결정이 된 일이기 때문에 또 그런 과정이 저 나름대로는 그 과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렇게해서 김영삼씨하고 정치활동을 같이 하게 됐습니다.

9. 이당시 야권통합 실패가 2년뒤에 3당합당으로 드러났다, 그때 정책실장으로서 통일민주당에서 실무중심으로 뛰게 됐을텐데 88년 총선을 겪으면서 YS가 굉장히 좌절감에 빠지게 됐다고 그러는데...

그게 88년 봄에 선거에서 김영삼씨 통일민주당은 24%를 득표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씨의 평민당은 18%를 득표했습니다. 근데 의석은 평민당은 한 69석이 되버리고 통일민주당은 58석인가 59석이 됐어요.

왜 그런 결과가 나왔냐면 영남지역은 선거구 인구가 호남보다 훨씬 많게 잘랐고 또 민정당이라는 같은 영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하고 대립을 하게 됐고 호남지역은 인구가 훨씬 적게 선거구를 자르다보니까 인구에 비해서 많아졌습니다.

의석수가. 그리고 수도권에서 또 소위 선명논쟁을 통해서 재야세력을 대거 입당시켜가지고 평민련이라는 단체를 입당시켜서 소위 혁신적 이미지를 덧붙였기 때문에 평민당이 약진을 하게 됐죠.

그래서 이제 김영삼 총재가 느낀 좌절감이라는게 아니 득표를 더 많이 했는데 그것도 한 1~2%도 아니고 6%씩 많이 했는데 의석은 적어졌다, 결국은 이게 소선구제의 폐단이거든요.

야권단일화가 결렬될때 그 명분을 김대중씨가 소선거구제로 잡았습니다. 명동성당에서 서경원 전의원이나 이런 사람들이 농성을 했는데 소선거구제 하라고 그래 나중에 김영삼씨가 소선거구제 받았거든요. 근데도 야권통합은 깨버렸어요.

그 4:4:2라는게 상당히 김영삼씨 통일민주당으로 보면은 엄청난 양보를 한 지분할당이었습니다. 그때. 그런데도 그건 안받고 그렇게 하신 이유는 결국 소선거구제하에서는 선거를 하면 호남지역만 석권하면 제1야당이 될 수 있다는 아마 그런 생각을 하셨던거 같에요.

그리고 그 지금 지역구도라는거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가 87년11월에 김대중씨가 절보고 왜 이렇게 소신이 흔들리냐 하면서 4자필승론을 설명하실때부터 이미 잉태된게 아니냐 결국 4자필승론이라는건 지역분할구도거든요.

그것이 88년 봄의 선거에서 고대로 지역분할로 나타나..그 유산이 지금까지 지역당구도로 온거 아닌가 그런 점에서 참 양김씨의 분열이라는게 우리 정당사에 엄청난 굴곡을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어 : 김능구 폴리뉴스 발행인
정리 : 한윤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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