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3월 18일 자비다 사고로 사망한 청년을 위로하는 비문 <사진= 마닐라타임즈 (2015.3.25)>
▲ 1968년 3월 18일 자비다 사고로 사망한 청년을 위로하는 비문 <사진= 마닐라타임즈 (2015.3.25)>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 중 하나는 국경을 기준으로 사람의 이동이 단절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사람이 이동했던 곳도 이제는 그 흐름이 끊긴 곳이 많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배를 타도 한 나절에도 다녀올 수 있는 거리지만, 두 곳을 운항하는 배편이 언제 재개될 지는 기약할 수 없다. 한국과 일본, 국가와 국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인식되지만, 부산과 대마도는 50킬로도 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있어 맑은 날에는 상대 지역을 볼 수 있다. 섬은 바다에 의해 단절된 곳이지만 동시에 다른 섬과 대륙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인식할 수 있다. 이 징검다리는 서로 다른 공간의 사람을 연결하는 곳이며, 인간의 이동은 둘 사이의 문화적, 역사적 간극을 좁혀줄 수 있다. 정치, 군사, 종교적 문제로 국가 단위로 분절되어 있는 곳에서도 섬은 닫힌 곳이 아니라 열린 곳이 될 수도 있다. 다음은 필리핀의 남북단의 섬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갈등과 분쟁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이면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동과 연계에 대한 것이다.

필리핀에는 영토 분쟁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두 곳이 있었다.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군도(Spratly Island)를 두고 중국과 분쟁 중이며, 현재는 다소 잠잠해졌지만 남단의 사바섬(Sabah)을 두고 말레이시아와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마르코스 대통령 집권 시기였던 1968년에는 사바를 획득하기 위하여 특수 부대를 파견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작전은 실행되기도 전에 취소되었고 특수훈련을 받던 부대원은 집단 사살되기도 했다. 취소된 작전이 공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살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며, 이러한 집단 사살도 수십 년 동안 은폐되었다. 한국의 실미도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 비극적인 사건의 뒷배경에는 특수부대원의 출신지역과 연관된 부분도 있다. 말레이시아 영토인 사바 섬에 침투할 특공조를 모집하기 위하여 필리핀군은 그 섬과 가까운 타위타이(Tawi-tawi)나 술루(Sulu)에서 주로 사람을 찾았다. 이들 대부분은 사바 사람들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다. 이전부터 필리핀의 술루나 타위타위 섬과 말레이시아의 사바 섬 사이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고 가족이나 친족으로 연결된 경우도 많았다.

사바섬을 점령하기 위한 마르코스 대통령의 작전을 위해 필리핀 남부에서 선발된 훈련병은 마닐라에서 가까운 코레히도르(Corregidor)라는 섬에서 침투훈련을 받았다. 이와 동시에 심리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바섬에는 군정보원이 파견되었고, 특수부대가 상륙하면 이를 돕기 위한 준비를 했다. 18세에서 30세 사이의 200여 명 청년이 자비다(Jabidah)라고 불린 이 특수부대에 입대하였고, 이들에게는 정규군이 된다는 약속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이 훈련병에 대한 식량은 형편없었고 약속한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처우에 불만을 가진 훈련병 중 항명을 하는 사람이 생겼고 이들 중 일부는 집으로 귀환할 것을 명받았다. 하지만 1968년 3월 1일, 23명의 무슬림 훈련병은 집에 돌아가기 전 사살되었다. 이들이 항명한 것은 음식이나 월급과 같은 처우문제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들은 자신이 수행할 작전이 가까운 친척이나 같은 무슬림을 죽이는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메르데카 작전(Oplan Merdeka)이라고 불린 이 작전은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필리핀 남부에 이슬람교가 더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바섬은 말레이시아가 실질적 점유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말레이시아는 연방 체계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전 세계적으로 무슬림 확산 운동이 일어나는 때이기도 했고, 사바섬과 타위타위섬 사이에 밀수도 성행하고 있어서 필리핀 정부는 여러 가지 목적 하에 침투를 하려하였다. 하지만 준비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자 계획 자체를 비밀로 묻어두기 위해 학살을 감행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필요에 따라 사바 섬을 잘 알고 언어가 통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특수부대를 조직했다고 하지만, 중요하게 간과한 사실은, 선발된 사람들은 국적은 다르지만 침투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지역사람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람사이의 연결을 이해 못한 작전 계획은 결국 파국으로 이어졌고, 필리핀에서 무슬림 반군 활동이 더 거세게 된 이유가 되고 말았다.

필리핀은 북쪽 해역과 관련해서는 중국과 분쟁을 겪고 있다. 스프래틀리군도(Spratly Island)나 스카보로암초(Scaborough Shoal)에 대해서 중국은 이른바 구단선(Nine-dash line)을 근거로 자신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16년 상설주재재판소(PCA)는 남중국해문제와 관련하여 제소된 양국의 분쟁에 대해 필리핀의 손을 들어 줬다. 남중국해 문제는 비단 중국과 아세안 개별국가와의 분쟁이 아니라 미-중의 군사 안보 경쟁과도 맞물려 있어서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군사, 외교상에서 중차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실제 일상생활에 영토분쟁에 가장 영향을 받는 집단 중의 하나는 어민일 것이다. 노르웨이 학자, 스타인 퇴니슨(Stein Tonnesson)은 1957년의 영국 정부 기록에 중국 하이난 출신 어민들이 정기적으로 남중국해에 조업을 위해 드나드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영토분쟁이 극에 치닫던 2016년 전후에서도 필리핀 영해에 진입한 중국 어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이 전함을 배치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때로는 어민의 출입 자체가 어업행위라기 보다 정치적인 도발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된 역사자료에 따르면 하이난과 스프래틀리 군도 사이에는 어민의 조업활동과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음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하이난 거주 사람들은 계절에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어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주변은 지금도 배가 드나들기 어려운 조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예전의 배로 어떻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연구할 대상이라고도 한다. 영토 분쟁에 묻혀 오랫동안 어업을 하던 어민의 활동과 이동은 국제적인 장에서 언급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렇게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이동을 오늘날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을까? 2000년 필리핀 국방부 장관이었던 메르카도(Mercado)는 양국의 어민이 조업활동을 할 수 있는 공동어장을 제안한 바 있다. 필리핀에서 사바섬을 드나드는 필리핀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섬은 국가와 국가가 경계를 만들고 분쟁하던 시기 이전에 교류하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들은 분쟁의 시기에 어느 편을 들 수 없을 만큼 양쪽을 연결할 수 있는 매개가 된다.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이동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국가와 국가를 평화적으로 잇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경계를 만들고 단절과 고립을 하는 단위가 아니라, 연결하는 징검다리로서 섬이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전환을 위해서는 국경이 아니라 인접 지대의 교류나 문화적 공통성과 같은 연구를 더욱 수행할 필요가 있다. 적대와 경쟁이 아니라 공생을 위한 해법을 찾아야 할 때이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법모는 인류학자이며 현재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부 조교수로, 현재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추진하는 ‘섬 인문학 연구단’에 참여하고 있다.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 전공자로 섬과 섬사이의 연계 및 해양 문화와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류학자들, 동남아를 말하다](공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소비문화: 맛과 멋, 공간, 그리고 할랄](공저), [개발에 대한 저항과 투만독 토착민 공동체 형성] 등이 있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