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을 내세운 노태우 후보와 단일화에 실패한 양김
3당 합당으로 형성된 세로 집권에 성공한 YS
DJP 연합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DJ
온라인 기반 선거 캠페인 시대를 연 노무현 후보
본선보다 치열했던 당내 경선을 거친 이명박 후보
강한 리더십으로 캠프를 장악했던 박근혜 후보
개혁과 안정감을 동시에 내세운 문재인 후보

지난 3일 동국대‧상생과통일포럼 리더십 최고위과정 8기 제19차 강의는 김능구 ㈜이윈컴 대표가 진행했다. 김능구 대표는 서울대학교 인문대 서양사학과와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졸업하고 1991년부터 정치 커뮤니케이션그룹 (주)e윈컴의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 대표는 그 동안 14대 총선부터 시작하여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 지방자치 선거 등을 치르며 수많은 국회의원 및 광역·기초자치단체장을 당선시켰다.

김능구 대표는 강의 서두에서 “내년 총선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할 선거”라면서 이번 총선을 통해 2022년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 나설 대권주자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대표는 직선제 개헌을 통해 1987년부터 치러진 13대 선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대통령 선거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경험을 통해 각 후보의 개성과 선거 캠페인의 장단점을 분석했다. 

또한 김대표는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시험대에 놓이고 결국 국민의 선택을 받게 되는 지를 실감나게 전하면서 2022년 대권 경쟁은 사실상 지금부터 시작됐다는 말로 강의를 끝맺었다. 

다음은 김능구 대표의 강의 전문이다. 

내년 총선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한다. 내년 총선에서 대한민국의 혁신을 책임질 수 있는, 각 지역과 정당의 혁신을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을 우리 국민들이 선택해내야 한다고 본다. 그 선택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방도다.

오늘은 대통령 선거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겠다. 13대 대통령선거야말로 6월 항쟁 이후 직선제로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은 첫번째 선거다. 2022년 대선까지 짚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제13대 대통령선거(1987)

우선 13대 대통령 선거의 포스터들을 보자. 이 위에 있는 부분을 캐치프레이즈라고 한다. 선거에서 캐치프레이즈 하나를 선정하기 위해 엄청 고민한다. 수많은 의견과 조사기관을 통해서 얻은 걸 통해 후보가 핵심적으로 이길 수 있는 포인트를 잡아낸다. 그게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때 노태우 후보는 ‘안정’을 이야기했다. 사실 6월 항쟁은 1961년도부터 1987년까지 30년간의 군부독재 세력을 몰아낸 항거였다. 그 후 헌법을 바꾸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게 된 거다. 그런데 전두환의 동기이자 부하로 같이 있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이 있었다. 당시 선거에서 폭발력이 있었던 건 대중집회였다. 지금 여의도 공원이 있던 자리에 여의도 광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에 김대중 후보가 군중 100만명을 모았다. 일주일 뒤 김영삼 후보가 100만명을 모았다. 김대중과 김영삼, 두 후보의 측근뿐만 아니라 지지하는 국민들은 모두 자기들이 당선된다고 생각했지 노태우 후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김종필 후보는 당선되리라 생각하고 출마한 것은 아니었다. 선거는 무조건 당선되기 위해 출마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다. 누가 생각하더라도 당선되지 않을 건데 왜 출마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받은 지지율을 가지고 앞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거다. 대통령 선거를 나와야 지지세력이 결집된다. 그리고 김종필 후보는 충청도라는 지역기반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나와야 했던 거다. 그래서 이 구도를 1노3김이라 부른다. 이 시기는 말로만 듣던 3김을 모두 볼 수 있는 선거였다.

미국의 CIA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당시에 건너 들었다. 노태우를 컨설팅했다는 말이 있었다. 6.29 선언 이전인 6월 18일 전에 들어와서 조사∙분석을 하고 전두환과 독대했다고 했다. 그들은 3김, 특히 양김이 전부 출마하게 되면 무조건 노태우가 이긴다고 말했다고 한다. 양김 두 정치인의 표를 합치면 50%가 넘는데, 두 사람의 지지율이 너무 팽팽하다는 거다. 그래서 최고의 선거전략은 두 후보가 단일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어떤 제품이 랭킹 1위라면, 랭킹 2위와 3위가 서로 싸워서 랭킹 1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없애버리는 전략이다. 그래서 당시의 최고 선거 전략은 양김 단일화를 막는 것이었다.

말로만 단일화를 막는 것이 아니라 단일화를 막기 위한 여러 가지가 펼쳐졌다. 첫번째는 DJ에게100% 이긴다는 조사결과를 주고 YS에게도 100% 이긴다는 결과를 주는 거다. 이게 유명한 김대중의 ‘4자 필승론’이다. 네 후보가 붙으면 그 중에서 가장 지역 결집율이 높은 게 호남이다. 그리고 수도권에는 30%의 호남 사람이 살고 있다. 이게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마의 25%’다. 25%는 무조건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다. 거기서 5%만 더해도 이긴다. 네 명 붙었을 때는 30%로 이긴다는 계산이다. 양김의 각 진영에서는 자기들이 무조건 이긴다고 봤다. 감으로만 한 게 아니라 근거가 되는 구체적 데이터도 있었다.

그래서 노태우 후보 쪽은 3김의 득세, 특히 양김의 득세에 ‘고개 숙인 남자’처럼 지냈다. 이 당시에 노태우를 보고 모두들 ‘물태우’라고 했다. 그런 만만한 이미지가 군부독재의 괴물에서 ‘보통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데 작용했다. ‘안정’이라는 이미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게 ‘보통사람의 시대’였다. 보통사람이라는 게 영어로 plain people이다. 미국에서는 가장 많이 쓰는 선거 슬로건이다. 이런 식으로 노태우는 갑자기 뭔가 좀 동정해야 할 불쌍한 사람의 이미지를 가져갔다. 잘 알다시피 광주유세에서 시민들이 던지는 돌멩이를 피해 도망가는 사진 등으로 인해서 TK가 꽉 뭉치게 된다. 그리고 수도권의 기득권 세력들이 꽉 뭉쳤다. ‘이거 잘못하면 큰일 나겠다’로 말이다. 그리고 13대 대선은 노태우는 36%, 김영삼은 28%, 김대중은 27%의 결과가 나왔다. 이렇게 36% 득표한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 거다.

그래서 양김은 단일화를 하지 못한 것에 사과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3김의 정치는 그렇게 하는 거다. 지난 번에 문재인 대통령 보고 선거 지고 당대표 물러나지 않느냐고 한 건, 국민들에게 이런 학습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3김은 무엇이든지 문제가 생겼을 때는 책임지고 상응하는 액션을 했다. 여기서 가장 큰 건 정계은퇴다. 그래서 정계은퇴를 선언한 거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이 사람들이 정계를 떠난 게 아니다. 그 다음 88년도 13대 총선을 치를 때는 억지로 끌려나오는 모양을 통해 당 대표로 복귀한다.

이 13대 총선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소야대가 만들어진다. 이런 정국에서 '광주 청문회', '5공 청문회'를 열었다. 그 '광주청문회'를 통해서 노무현이라는 당시 초선 국회의원이 전두환을 향해서 명패를 집어 던지면서, 그 사진이 전 국민들에게 각인 됐다. 다른 사람들은 정주영 회장을 공격하더라도 막상 증인으로 나오면 야당의원들도 일어서서 '회장님~'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거기에서 일관되게 공격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새로운 정치의 화신이 됐던 거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으로서는 여소야대 정국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국회와 똑같다. 여소야대라는 것은 여당이 과반을 못 넘었을 때 야당이 연합한 것보다 숫자가 적을 때를 말한다. 당시 민정당이 1당이었고, 박근혜 대통령 때도 새누리당이 1당이었다. 하지만 과반에 미달한 1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없다. 

사실 국회도 우리나라 같은 곳이 없다. 미국 대통령제에서는 1당이 되면 국회의 모든 상임위원장을 전부 독식한다. 우리나라는 의석수에 따라 여당 몇 석, 야당도 의석수에 따라 몇 석씩 나눈다. 희한한 평등의 문화가 우리 국회에 뿌리박혀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런 여소야대 상황에서 실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야당에 끌려가는 와중에 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노태우 대통령은 처음에 6.29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전두환이 기획하고 노태우가 배우를 했다는 말이 있지만 어쨌든 6.29 선언은 노태우가 발표한 거다. 그리고 나서 제2의 승부수로 '3당 합당’을 감행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13대 대선 후보로 나왔던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세 당(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이 모여서 거대정당을 탄생시킨다. 

이건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짓 못해먹겠다’라고 했던 심정과 똑같은 거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도 굉장히 속이 썩어가지 않겠나 생각한다. 이전에 민정수석과 비서실장 할 때 이를 열 개나 했다는 데, 이번 대통령직을 마치면 또 이가 왕창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정도로 스트레스가 큰 직업이다.

 

제14대 대통령선거(1992)

이때 사진을 보면 13대 선거의 김영삼 후보와 14대 선거의 김영삼 후보의 사진이 전혀 다르다. 제일 큰 차이가 이마다. 안정감을 주기 위해 머리를 넘겼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변화와 개혁을 제일 많이 이야기한 사람이 김영삼이었다. 입만 열었다 하면 경상도 사투리로 ‘밴하와 개역’을 이야기했던 사람이다. 이 포스터를 보고 우리는 ‘1번 포스터’라고 한다. 보수, 안정을 바라는 유권자를 타겟으로 하는 후보의 포스터는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는 거다. 후보의 이미지는 이마를 드러내고 양복도 반듯하게 입는다. 이때만 해도 후보들은 사진에서 이를 드러내지 못했다. 이빨을 내면 불경스럽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사진 찍을 때는 입술을 촉촉이 적셔서 머금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김대중 후보는 사진을 못 구했다고 한다. 사진 수천 장을 깔아놓고 찾는데 어느 지구당에서 찍은 사진이 눈에 띈 거다. 옆얼굴이 나온 사진이었다. 나는 이 선거는 끝났구나 싶었다. 지지 의사를 확실히 굳힌 사람들은 어떤 얼굴이든지 표를 찍을 거다. 그러나 undecided voter라고 아직 결정하지 않은 유권자들은 그래도 포스터를 보고 감을 잡을 텐데, 얼굴을 옆으로 돌려놓으니까 느낌이 바로 안 오는 거다. 그래서 이때 포스터 사진을 잘못 골라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나오곤 했다.

그리고 이 14대 대통령 선거를 역동적으로 만든 것은 김대중이 아니라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은 정말로 당선된다는 확신을 갖고 출마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현대 가족이 직원 한 명당 4인 가족으로 치면 100만명 정도 된다. 그 100만명이 이웃과 친척을 설득하면 800~1000만명 사이로 득표하면서 당선될 거란 말이었다. 그래서 전국 지구당에 당시 4월 총선에서 받은 표대로, 예를 들어 낙선했지만 서울 지역에서 1만표 이상 받은 사람, 5천~1만표 받은 사람 등은 차가 달라지고 기사가 달라졌다. 어떤 곳은 기사를 주기도 하고 어떤 곳은 기사를 출퇴근에만 쓰게 했다. 253곳의 지구당 사무국장을 전부 현대맨들로 깔았다. 그러다 보니 엄청나게 돈이 들어갔다. 위원장들의 자동차, 지구당 활동비 등등 그 당시 정치판에 있던 사람 중에서 국민당 돈 못 받은 사람은 바보라고 할 정도로 돈이 넘쳐났다.

그리고 박찬종. '젊어서 좋다, 깨끗해서 좋다’가 슬로건이 됐다. 이 92년 대선 때는 박찬종이 노무현과 안철수와 같은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당시 전체적으로는 6%밖에 되지 않았지만 30대 지지율 1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3당 합당을 통해 형성된 대세 속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42%를 받았다. 당시에는 각축전이 치열했기 때문에 대단한 득표율이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41%였다.

 

15대 대통령선거(1997)

이때의 대통령 선거가 보수와 진보의 운명이 완전히 갈라지는 때였다. 이때 만약 이회창이 당선됐다면 보수는 지금과 달라졌을 거다. 정말 개혁보수의 길을 걸었을 거고, 보수의 변화를 보수의 중심 세력이 주도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때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지 못했다면 진보는 엄청난 분열의 길로 갔을 거다. 굉장히 중요한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내부에서부터 반대가 많았던 DJP 연합을 실시한다. 유신 때 군사정권의 표적이었던 김대중과 군사정권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종필이 손을 잡는다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당시 DJP, DJ와 JP가 연대하게 된다. 호남-충청의 연합론. 호남 인구가 10% 정도 된다. 충청도 10% 된다. 여기까지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수도권에서 달라진다. 수도권 인구가 전국의 50%라고 한다면 수도권의 30%가 호남이고, 수도권의 2-30%가 충청이다. 그럼 수도권의 호남, 충청 인구는 전국의 30%가 되는 거다. 결국 합하면 50%가 되는 거다. 호남-충청의 표가 결코 작은 게 아니다.

내년 선거도 그렇고, 총선이나 지방선거는 무조건 수도권에서 충청표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판세가 결정된다. 호남과 수도권을 더한 것 보다 영남과 수도권을 더한 것이 조금 더 많다. 여기서 충청표가 어느 곳으로 가느냐에 따라 선거가 결판난다.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김대중이 그간 선거를 치르면서 ‘이제는 자력으로 안되겠다’고 판단을 한 것 같다. 이 연합에 당내 반대가 극심했다. 

이때 김대중이 DJP연합을 만들어냈지만, 선거라는 것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인생에서도 자기가 잘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허당 수를 둬야 한다. 이 선거는 사실 이회창 본인이 망친 선거다. 지금도 당시 한나라당 있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저히 질래야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고 말한다. 이때는 한나라당의 인재풀도 더 넓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바뀌었는데, 신한국당이 조순의 민주당이 합쳤다. 이부영, 제정구 이런 사람들이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선거운동을 했을 때였다. 김대중과 지지율 차이는 20%씩 나고 있었다. 그해 9룡이다 해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있었다. 그 경선에서 이인제가 2등을 했다.

이회창과 김영삼을 두고 누가 더 속이 좁은 사람이냐 물어보면 나는 이회창이라고 말한다. 김영삼은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에 이회창에게 당대표를 맡겼다. 아마 내년 총선이 끝나면 대선 후보들은 모두 당대표에 도전할 거다. 당대표가 되고 대선후보가 되는 게 관례처럼 되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당대표라는 것은 당의 재정, 인사, 공천권을 다 장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김영삼은 이회창에게 당대표를 맡겼다. 그래서 최형우 의원이 그 소식을 듣고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다. 어느날 이회창이 청와대로 들어갔는데, 민주계에서는 깨질 것으로 전망했다. 국무총리로 대통령에게 대들고 그만둔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회창에게 당대표를 준 것이다. 그러니까 당이 발칵 뒤집어지고 최형우 의원은 쓰러졌다.

이회창은 당대표로 있으면서 이른바 ‘9룡’, 아홉 명이 나오는 후보경선을 치렀다. 허주 김윤환 대표가 모든 총대를 다 메고 정리를 시켰다. 그래서 대선 경선에서도 여유롭게 1등을 차지했다. 그런데 경선에서 2등을 한 이인제가 자기는 젊었으니까 다음에 나와도 되는데, 이때 처음으로 출발해서 이후로도 5번이나 출마했다. 당은 다 다르다. 내가 이인제 후보를 인터뷰하면서 ‘대표님 몇번째입니까’라고 물으니 ‘참 많이 한다’라고 답했던 기억이 있다. 이때 이인제 후보가 19.9%를 받았다. 거의 500만표를 받은 거다. 이회창이 김대중에게 39만표로 졌다. 이회창이 이인제만 붙잡았어도, ‘너는 총리다’, ‘다음 대선은 네가 해라’ 이 한마디만 해줬어도 당선될 수 있었던 거다. 이인제는 스스로 안 될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이회창이 미워 죽겠다는 거다. 나가면서도 본인을 잡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지만 이회창은 끝내 이인제의 손을 잡지 않았다. 이때 모든 사람이 이회창을 만나서 대통령이 약속 못 할 게 뭐 있겠나 총리도 준다, 당대표도 준다고 말하라고 했지만, 이회창은 끝내 자기의 뜻이 아닌 건 거짓말을 못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참 올곧은 사람이다. 하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돌아버릴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가 우리 발등을 찍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우리 후보로…’ 자기 혼자만 독야청청인 거였다. 이때 이회창의 별명이 ‘대쪽’이었다. 본인도 가장 좋아한 별명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대쪽 때문에 망한 선거였다.

이때 박찬종 대표가 이회창의 선대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에, 아들 병역문제에 대해 형식적이라도 사과를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 명분으로 선대위원장 직을 수락하겠다는 거였다. 거창한 기자회견 필요 없이 누가 물어보면 ‘그 부분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말만 해달라는 거였다. 이회창은 그 말도 끝까지 하지 않았다. 기자들에게 30분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30분 넘어 들어가면 기자들이 난리칠 것 같아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는 말이 있었다. 

이때 대선에서 이회창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김대중이 승리했다. 이때는 IMF라는 초유의 외환사태에서 모두가 국가부도 상황을 해결해 줄 사람을 찾는 과정이었다. 김대중 후보의 포스터에 나온 이 구호가 대단했다. ‘든든해요’ DJ는 대통령 네번째 나온 4수생이었는데 대선에 많이 나와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잘 안다는 이미지에 젊은 시절 해운회사와 언론사를 운영한 경영 경험을 내세웠다. 또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대중경제론’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은 심오한 책은 아니었으나. 하버드 대학 부교재로 채택이 됐다. 하버드에 채택될 정도의 경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든 거다. 

또 김대중 후보는 국회에서 상임위를 지금으로 치자면 기획재정위원회만 계속 했다. 김대중은 후배 정치인들에게 대권을 생각한다면 기재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예산과 재정을 다루는 상임위인 기획재정위원회 한우물만 파라는 거다. 국가 예산과 재정을 알면 국정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그래서 김대중은 어느덧 경제전문가란 이미지를 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든든해요 김대중, 경제를 살립시다’이다. 마치 이명박으로 얼굴을 바꾸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캐치프레이즈다.

그런데 당시 이회창은 인터뷰에서 ‘저는 경제를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IMF 시기에 국가 부도가 났다고 모든 사람들이 경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찾고 있는데, 이 사람은 당당하게 ‘저는 경제를 모릅니다’, ‘경제는 우리 조순 총재가 잘 압니다’라고 말한 거다. ‘깨끗한 정치는 제가 하고, 튼튼한 경제는 조순 총재가 할 겁니다’라고 둘이서 기자회견을 할 때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포스터는 자기 혼자 나와야 한다. 그래서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의 캐치프레이즈가 나왔지만 사실 튼튼한 경제는 이회창 후보의 것이 아니었다. 경제를 모른다고 본인이 이야기해버렸다.

39만표 차이로 낙선할 때 이인제를 못 막은 것 500만표, 박찬종의 영입 실패로 인한 15만표, 튼튼한 경제에서 경제를 모른다고 헛발질 한 표 등 (어림잡아) 700만표를 까먹고도 39만표 차이(1.7%) 밖에 안 났다. 이런 걸 문지방 넘으려다가 넘어졌다는 말로 표현하곤 하는데 딱 그런 상황이다. 이회창 후보뿐만 아니라 많은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한 달가량 잠 못 자고 술 마시는 날이 이어졌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대통령 되는 것으로 보고 자기들도 한자리 맡을 꿈을 꿨을 것이기 때문이다.

16대 대통령선거(2002)

2002년도 16대 대통령선거는 포스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주목받은 또 하나의 인물이 정몽준이다.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세명의 대결이었다. 2000년도 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총선을 치렀는데 과반 정당이 못 됐다. 이회창의 한나라당이 제1야당으로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이회창은 '밤의 대통령'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선을 앞두고 2000년부터 2년 간은 권력이 상대쪽으로 넘어가려고 하니까 정보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국정원, 검찰, 경찰청 정보과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모든 연고를 통해서 정보를 넘기고 충성 맹세를 했다고 한다. 

늘 여당은 작살이 났다. 야당이 정보기관의 자료를 가지고 공격을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엄청나게 당하고 탄핵 사태까지 갔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때 이후로 온전히 정신을 갖고 살아가기 어려웠을 거다. 정말 감옥을 100년 사는 것보다 더한 일이었을 거다. 이회창이 그 정도로 막강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후보의 '새로운 대한민국', '나라다운 나라' 이 캐치프레이즈를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생각날 거다. 이 당시의 캐치프레이즈가 실현이 안되니까 촛불을 들고 나온 거다. 선거 당시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잘 살게 된다, 행복한 나라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때 2002년 월드컵의 기세를 업고 정몽준 후보가 30 몇 퍼센트까지 올라가고, 어떤 조사에서는 1등까지 했다. 거기서 정몽준은 1등인 이회창과 손잡기 보다는 만만한 노무현과 손잡아 이기면 후보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단일화 여론조사에 더 적극적인 게 정몽준이었다. 노무현은 자서전에 '정몽준이 되는 것보다 이회창이 되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몽준은 재벌의 이해관계에 깊게 오리엔트 되어 있는 사람인데 이회창은 대쪽으로 더 낫지 않나'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다 깔려 있어서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 대연정이라는 손도 내밀게 됐다. 노무현은 진보와 보수를 죽여야 할 관계로 보지 않은 거다. 

단일화 과정에서 정몽준 팀이 치밀함에 있어서 노무현 팀에 못 미쳤다. 노무현 팀은 조사실무 전문가들이 가서 협상을 했고, 정몽준 팀은 그렇지 못했다. 여론조사에서는 질문이 제일 중요하다. 여론조사는 '어' 다르고 '아' 다르게 질문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예를 들어, '이회창과 노무현 중에 누가 이길 것인가, 이회창과 정몽준 중에 누가 이길 것인가'처럼 이회창과 가상대결을 붙여서 이기는 사람으로 정한다면 노무현이 되지 않았을 거다. 당시 여론조사할 때 3자 대결에서 노무현이 정몽준보다 늘 10%, 7~8% 정도 뒤쳐지는 걸로 나왔다. 그런 여론조사로 했으면 후보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설문조사를 '이회창과 붙는데, 노무현과 정몽준 중에서 누가 적합한가'로 물었던 거다. 우리 편 후보로 누가 이기냐가 아니라 누가 더 적합한가로 물어본 것이다. 이 질문이 나중에 2012년 문재인과 안철수 단일화 때도 등장해서 안철수 측에서 '옛날에 썼던 걸 또 쓰려고 한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 후보를 사퇴해버렸다.  

이렇게 노무현으로 단일화가 되고 이회창은 2.3% 차이로 졌다. 이렇게 되면 선거를 다시 나올 수밖에 없다. 자려고 누우면 자기가 청와대에서 집무 보는 광경들이 눈앞에 아른거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 다 문지방에 걸려서 넘어졌던 거다. 

지난 대선의 이회창, 김대중 후보가 나온 선거는 우리 선거문화를 확 바꾼 시기였다. 바로 TV 토론이 처음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2년의 선거는 바로 인터넷 선거였다. 내가 2000년에 언론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2002년에 대선후보 인터뷰를 했다. 

선거 캠프에 가보면 이기는 후보와 지는 후보의 분위기가 바로 느껴진다. 이기는 후보는 뭐가 복작복작한다. 그런데 지는 후보들은 가보면 독서실처럼 조용하다. 사람도 별로 없고 전화도 소곤거린다. 그런데 노무현 캠프는 당시에 조용한 그런 분위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2%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30%대로 치달을 때였다. 민주당에서도 노무현이 후보가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거기서 내가 노무현 후보에게 '후보님, 올겨울에는 인터넷의 영웅이 탄생할 겁니다'라고 했다. 당시 인터넷 하면 노무현이었다. 노무현 캠프 사람들이 한 건 피시 통신 등으로 퍼 나르는 일뿐이었다. 돈도 없는 사람들이었으니 그거밖에 할 게 없었던 거다. 인터넷을 활용한 캠페인에서는 노무현이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노사모'가 인터넷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캠페인을 벌려나가기도 했다. 나의 인터넷 영웅이 탄생할 거란 덕담에 노무현 후보가 파안대소하며 '야, 오래간만에 힘이 난다. 내가 된다안카나. 느그들도 들었제?'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회창 후보는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넘어졌고, 아들 병역문제가 또 발목을 잡았다. 부모 자식 간의 문제가 참 어려운 문제다. 당시는 젊어서 몰랐는데 이제 오십대 후반이 되고 보니 그 심정이 이해가 되더라. 자기 아들들만 아니었다면, 옆에 세워두고 사람들 앞에서 '죄송합니다' 한마디만 했다면 넘어갔을 거다. 그런데 그걸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지난 번에 떨어졌는데도 이번에도 끝까지 거부한 거였다. 

이인제는 또 나왔다. '다시 뛰자 대한민국, 부지런한 대통령'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을 보면 이때는 민주당이다. 

 

17대 대통령선거(2007)

이 선거는 이명박의 독무대였다. 경선이 본선이었다. 한나라당의 경선에서 박근혜와 이명박의 대결이 사실상 본선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명박은 막강한 재력을 위시해서 세를 불렸고, 박근혜는 박정희의 후광과 의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모아 팽팽했다. 그런데 여론조사에서는 이명박이 박근혜보다 항상 15% 정도 높게 나왔다. 

이명박의 포스터를 보면 아까 말한 김대중의 포스터와 비슷하지 않나.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 이 사람은 얼마나 자신 있었으면 슬로건도 없이 배경에 태극기만 놓고 아래 조그많게 써 놨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박근혜와 대결에서 전당대회 결과가 20%까지 차이가 날 줄 알았다. 당시 내가 매경티비에 나가서 이번 한나라당 경선은 박빙의 승부가 될 거라고 말했다. 누가 이기더라도 1, 2% 차이일 거라고 했다. 왜냐하면 당원들 사이에서는 박근혜가 단단하다. 내가 조사를 해보니 TK에서 이명박이 당을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를 하더라. 수도권과 여론조사에서 이명박이 앞설 따름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서로 간에 박빙의 승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과는 1.1% 로 이명박이 이겼다. 당원선거에서는 졌다. 그리고 여론조사에서 여섯 명 정도 차이로 이겼다. 그래서 여섯 명이 과대평가 됐다고 해서 무효라고 주장했는데, 박근혜 당시 후보가 전당대회에서 승복 연설을 한다. 그때 아마 박근혜가 승복하지 않았다면 난리 났을 거다. 

당시 내 이야기를 들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CBS ‘시사자키’에 나를 불렀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예측했냐고 묻더라. 김어준은 패널들을 불러놓고 정신 없이 질문해서 넋을 빼놓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 다음에는 김어준이 이야기하는 대로 쪽쪽 빨려나가게 된다. 

이회창은 이번에도 또 나왔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BBK 문제로 낙마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보수세력들이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면 이명박이 아웃될 걸 대비해서 대체재로 나온 것이다. 신기하게도 15.0%를 득표했다. 그래서 파산을 면했다. 

이때 정동영 후보와 문국현 후보 사이에 단일화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유의미한 단일화가 되려면 두 후보의 합이 이명박 후보를 넘거나, 흔들 정도가 돼야 하는데 끝내 그러지 못해 무산되었다. 

18대 대통령선거(2012)

이정희 후보가 싸가지 없다고 욕을 많이 먹었다. 사실은 내가 생각할 때 이정희 후보가 TV토론에서 한 이야기들이 다 맞아떨어졌다. 반면 당시 문재인 후보는 나이브했다. 18대의 문재인 후보와 19대의 문재인 후보는 180도 다른 사람이었다. 이 당시 문재인 후보는 정치 안하겠다는 사람을 등 떠밀어 국회의원 선거 나오고 대선까지 나오게 된 것이었다. 이때는 후보로서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결기, 정책능력, 친화력을 종합해 볼 때 대통령 당선에는 부족했다. 박근혜 후보가 51.6% 득표하고 문재인 후보가 48% 받았다. 대선 티비 토론 때 문재인 후보가 이정희 후보만큼 똘똘했다면, 이정희 후보가 아니라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게 따지고 단점을 짚었더라면 결과가 바뀌지 않았을까 한다. 

(후보가 캠프를 장악하지 못하면) 홍보물 같은 경우도 팀에서 시안을 주면 한 시간쯤 지나면 잡탕이 되어 버린다. 그에 비해 박근혜 캠프는 광고 전문가에게 맡겼다. 그리고 지도부 회의에서 '우리 광고는 이분이 다 알아서 하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토 달지 말라는 거다. 이 전문가는 한나라당 건물 12층에 사무실을 꾸리고 옆에 직원 한명 두고 일하는 걸 봤다. 박근혜 후보 포스터에 나온 저런 말풍선이 저 당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될 때 여러 가지 이벤트라든지 홍보물이라든지 정치광고는 끝내줬다. 선거를 이기려면 100가지 이유가 있다고들 하는데 정말로 이길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문재인 후보는 인물로 보면 선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후보로 봤을 때는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본다. 3.6%가 작은 차이 같지만 DJ가 이길 때 1.7%였다. 노무현이 이길 때는 2.3%였다. 선거 이후 국정원 댓글사건이 터져 그 영향력이 선거 결과를 좌우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19대 대통령선거(2017)

재밌는 게 있다. 문재인 후보의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보자. 나라다운 나라를 이야기했던 이회창과 든든한 대통령을 이야기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슬로건과 똑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의 정신인 '나라를 나라답게'를 사용한 거고, 대통령에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안정감이다. 지금 황교안 대표가 잘 나가고 있다.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10%대에서 20%대로 올라가고 어떤 조사에서는 30%까지 지지율이 나온다. 왜 그러는 지 물어보면 황교안 대표의 안정감 때문이라고 한다. 당대표의 안정감이 보수 지지 유권자로부터 '그래 우리도 꿈틀거려 보자'는 결집도로 나타나는 거다. 지도자의 리더십에서 안정감은 굉장히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포스터에서 이마도 지난 선거와는 달라보인다. 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넘겼다. 

홍준표 대표도 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넘겼다. 전에는 멋있었다. 모래시계 검사 소리도 듣고, 국적법 만들어서 젊은이들에게 히트쳤다. 가수 유승준이 미국으로 갔다가 못 들어오게 만든 게 홍준표 국적법이다. 이걸로 20대 사람들 사이에서 떴다. 

안철수는 이 광고 포스터 때문에 나중에 소송이 붙었다. 이 포스터에는 당명이 없다. 당명이 있어야 하는 데 당명이 안 들어 갔다. 

안철수는 한때 물밑 후보 단일화 논의를 왜 깼을까? 본인이 당선될 거라고 봤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안철수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올라갔던 때가 있었다. 어떤 조사에서는 문재인을 따라잡기도 했다. 대부분의 조사에서는 4~5% 차이가 났다. 본인이 봤을 때는 예측한 대로 가는 모습이었다. 한국 국민들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변화의 핵심에는 자기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거다. 만일 안철수가 단일화에 동의했다면 단일후보가 됐을지도 모른다. 여론조사에서 안철수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올랐을 때는 보수의 대변자로 나설 때였다. 문재인과 붙어서 누가 적합한가 물어봤다면 안철수로 결정됐을 수도 있다.

지금도 독일에서 자기가 돌아오는 그날 새 역사가 펼쳐질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거다. 이 분은 늘 하는 말이, 자기 책에도 그렇게 써 있는데 다리를 건너면 불질러 버린다는 거다. 자기가 지나온 길을 후회하지 않고 그냥 앞으로 나간다는 거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는 실패가 없었다. 정치도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박혀 있다. 반드시 이 분은 이번 총선에 반드시 컴백해서 지난 총선처럼 자기가 제3의 돌풍을 일으켜서 한국 정치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확신에 있어서는 유승민 대표는 한참 떨어진다. 하지만 안철수 못지 않게 유승민 대표도 고집을 갖고 있다. 

심상정 후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보정치가 정권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진보정당에만 머물러선 진보정치는 50년이 가도 안된다고 했다. 통일이 언제 이루어질 지 모른다. 분단 상황에서 진보정당과 진보정치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러면 정의당이 민주당 내에 하나의 섹터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 정당들은 세계에 숱하게 많다. 민주당 내에서 우파 블록이 있으면 정의당이 좌파 블록을 형성하라는 거다. 미국 민주당에서도 오바마가 맨 처음에 부시와 붙을 때 좌파 블록부터 다지고 점차로 우파로 갔다. 그래서 우파 블록을 가지고 민주당 통합을 이뤄내고 마지막으로 공화당 좌파까지 잡은 거다. 그래서 오바마가 낙승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책은 좌파에서 취할 건 취하고, 우파 정책은 우파에서도 취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 정도 정치를 오래했으면 이제는 진보/보수가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국민통합을 이루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오죽했으면 독재의 후예는 미래가 없다고 말했겠나. 하지만 사실은 그 어떤 독재의 후예들이라도 현실 정치에서는 국민의 대표고 헌법기관이다. 같이 풀 수밖에 없다는거다. 심상정 의원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민주당과 정의당이 대선후보를 놓고 경선하는 그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의당과 민주당 각각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민주당에서도 좌파 블록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잘 굴러 간다. 그리고 연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길이기도 하다. 

2022년 대선 후보군

우리 정치사에서 2년 전에 국민들이 몰랐던 사람이 갑자기 대통령이 된 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익히 아는 정치인이 대선 후보가 될 것이다. 여기 박원순 시장이 있는데, 참 안타까운 분이라고 생각한다. 저평가 우량주라고 말한다. 본인이 천만 서울을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들고 모든 분야에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평가는 대통령 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돌파하느냐가 과제다. 

보수정당에서는 황교안 대표가 총선까지는 치를 거다. 총선에 민주당과의 관계 속에서 최소 100석(1/3) 이상을 한국당이 받는다면 대선 행보에는 이상 없다. 그러나 100석 이하로 받는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황교안 후보가 흔들린다면 나올 후보가 나경원이다. 계속 투톱으로 뛰고 있다. 오세훈 전 시장도 도사리고 있다. 또 썩어도 준치라는 홍준표 전 대표도 있다. 다른 코스로 정우택 전 원내대표도 총선이 끝나고 결단 할 수도 있다. 

여기 후보들이 보수의 결집만이 살길이라고 말하는 가운데 약간 스탠스를 달리 하는 사람이 오세훈 전 시장이다. 이분은 중도확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보수의 결집에 말을 보태고 있다. 지금은 광진구을 지역의 추미애 대표와 승부에서 나오는 결과에 따라 대선후보로 나설 수 있을 지가 결정될 것이다. 

여당은 항상 많은 후보를 기획해서라도 만들어 내야 한다. 청와대의 일 중의 하나가 촛불 정신의 완성과 계승인데, 거기서 제일 중요한 일이 총선과 대선 승리다. 청와대가 총선과 대선에 신경 안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기본적인 책무다. 외국에서는 대놓고 한다. 대통령제에서 다음 대통령 선거를 어떻게 하는가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나.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치 중립의 의무를 걸어놓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 된 이유가 바로 '자기는 민주당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 법에서는 정치 중립의 의무가 엄중하다. 그래서 그런 거만 보면 야당과 보수언론에서 난리 치려고 하는 거다. 그래서 청와대는 그 부분을 조심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당에서는 이해찬 당대표가 판을 짜더라도 부족하다. 총리까지 포함해야 한다.

이낙연 총리가 청와대에서 미는 1순위가 될 거라고 본다. 이분은 올 정기국회가 끝나면 정부에서나올 거다. 12월부터 본격적인 행보를 하리라 본다. 사실 지금부터 다 깔고 있을 거다. 

이낙연 총리와 김부겸 의원이 같은 과로 신중하고 통합적이라면, 이재명 시장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과격하고 통합보다는 지지 세력에게 파급력이 큰 사람이다. 현재 민주당에서 20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20대 남성이 그렇다. 20대 여성의 문재인 지지가 45%면, 남성들은 15%다. 그 20대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이재명이다. 그래서 전체 선거판을 짜는 데 있어서, 20대를 공략할 후보로 이재명이 필요하다. 민주당과 문재인은 이재명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문 세력이 이재명을 (공격해도) 1심 무죄 판결은 (그 공격을) 그만하라는 메세지다. 이재명 지사가 문 대통령에게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경수는 2012년의 문재인을 연상케 하는 사람이다. 이 분을 대선후보군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풍부한 주자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또 친문세력이 확실한 친문 후보가 없다보니까 내세운 것이라 생각한다. 

내년 4월부터 여기 이 사람들이 벌이는 전쟁은 올해 12월부터 본격화 될 거다. 그리고 총선을 치르고 나면 살아남은 자들이 대선 앞으로 가게 된다. 여권에서는 문재인 대통령도 극복하지 못했던 '새로운 노무현'이라는 것을 통해 이념과 진영논리를 뛰어넘어서 국민통합을 위해, 나라 전체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뛰는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한다. 보수 세력은 대한민국 보수를 혁신하는 자가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것이다. 바야흐로 물밑에서는 대선 경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김 대표는 2000년 8월 인터넷 언론 <폴리뉴스>(www.polinews.co.kr)와 2009년 7월 월간 <폴리피플>을 창간하여 광범위한 휴먼 네트워크 및 각계 전문가그룹의 힘을 모아 정치미디어의 새로운 모형을 만들어 가고 있다. 폴리뉴스는 냉철한 정국분석과 함께 1000여회에 걸친 정치인 및 각계 인사의 심층 인터뷰,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 사이트로의 뉴스 제공을 통해 정치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해왔다. 또한 월간 <폴리피플>은 냉철한 정국분석과 정치인 및 각계 인사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정치미디어의 새로운 모형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김 대표는 정치권의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 비 정치권의 학계, 노동계, 산업계 각계각층의 다양한 영역에서 중추적역할을 하는 인사들과 함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자 2014년 6월 창립한 <상생과통일포럼>의 상임운영위원장으로서 상임고문 정세균 전 국회의장, 공동대표인 정우택 국회의원, 설훈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최창섭 서강대 명예교수와 함께 포럼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상생과통일포럼이 동국대와 함께 운영하는 리더십 최고위과정의 책임교수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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